노무현과 민주주의

1-2) 노무현이 남긴 세 개의 질문(下) ...정도상

똘돌이 2012. 6. 19. 12:08

 


[
특별칼럼]

 

노무현이 남긴 세 개의 질문(下)

- 지역공동체, 한미FTA, 민주주의

 

정도상(소설가)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노무현의 질문 (3):‘민주주의

세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였다. 노무현은 한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요소로 권위주의와 주류사회의 마피아적 결합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온갖 마피아와 정면대결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역주의에 근거한 정치권력 마피아
, 학벌과 학연에 뿌리내린 생활권력 마피아, 부패에 기생하여 부를 독점하고 있는 경제권력 마피아, 사실과 의견을 교묘하게 편집하고 왜곡하여 국민들을 판단착오로 이끌어내는 언론권력 마피아, 범죄의 증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공공의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수시로 발행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에게는 증거조작도 서슴지 않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가설을 법칙으로 전환시킨 사법권력 마피아,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만 판단하고 오직 좌우만 존재하는 것처럼 혹세무민하여 평화보다는 갈등을 조장하여 권력을 유지해온 이념권력 마피아와 정면으로 맞섰지만 패배했다. 권위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국세청,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진보적인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념적으로 이분화된 사회에서는 매순간 긴장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상층부의 일부만 자리바꿈을 했을 뿐이지 그 토대에는 깊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무서운 권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물결이 존재한다. 노무현은 그 물결을 소멸시키고 싶어 했었다.

토대를 이루고 있는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권력을 통제하며,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 더 많은 부를 다양한 방법으로 재생산해내는 마피아적 집단들이었다.

그들은 노무현과 긴장하며 언어 사용, 교육문제, 정치적 대표성, 언론의 자유(매우 위선적이었지만), 종교의 정치개입(초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반공 이념적 정체성, 시민사회 등의 분야에서 갈등하며 소모적인 분쟁을 야기했다. 그들의 치밀한 전략적 긴장은 향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위기로 나타났다. 노무현 이후, 마피아들은 노골적으로 권력을 사유화했고 검찰 등 권력기관들은 앞다투어 보수정당에 굴복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검찰이 선두에 서 있었다.

민주주의는 동일성(같아야 한다 혹은 같다)이 아니라 다양성(다르다)에 기초한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이념적 이분법으로 말미암아 주류사회의 마피아들과의 동일성을 늘 요구해왔다. 히틀러가 게르만주의의 동일성으로 집권한 뒤 무단정치를 실행한 것에서 보듯이 동일성의 요구에는 태연하게 학살을 불러올 정도로 폭력적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그 동일성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야 겨우 가능해졌다.

위험한 정치 과잉, 진보 과잉

어느 시대나 정치가 과도하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삶이 적대적 위험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정치의 과도한 권력행사나 과도한 선전선동이 바로 정치 과잉이다.

1945
8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한반도는 정치 과잉의 상태에 놓여 있다. 대한민국은 미디어에 의한 정치 과잉이 나날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당한 의견마저도 과감하게 정치적으로 왜곡하는 미디어의 힘이 국가와 시장과 시민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거대한 동일성의 국가이며 동시에 정치 과잉의 상태에 놓여 있다.

정치 과잉의 상태가 지속되면 삶의 외면과 내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하면서
, 개인의 인격이 모순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울러 개혁과 혁명과 정의를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이 추구하고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과 스스로 진보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정치 과잉으로 인해 민족의 삶은 훼손되었고, 개인도 성숙을 방해받았다. 이것이 분단체제가 낳은 상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과잉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진보 과잉이다.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위치한 사회문화적 공간으로 파악했다. 그람시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경제영역과 국가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가진 사회문화적 영역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진보는 과잉상태면서 동시에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가 당위만 주장하고 구체성을 상실한 이유는 가치와 욕망
, 조직과 관계, 권력과 술수, 존엄성과 비열함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복합체로서의 인간내면을 과소평가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탓에 깊이도 내용도 없는 패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질문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진보적 동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근거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것은 진보 마피아들의 완고주의에 기인한 바가 컸다. 보수진영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이념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고 욕망 또한 비슷하거나 욕망 실현의 방식이 철저하게 비민주적이라는 사실 앞에 노무현의 이 질문은 참으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해 진보진영은 깊은 성찰로 대답해야만 한다

노무현의 질문, 그에 대한 답변

결론적으로 노무현이 화두처럼 던진 세 가지 질문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노무현이 꿈꾸는 나라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답변에 대해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노무현의 질문에 대한 상상력 고갈이 심각할 정도로 우려된다. 진보는 진부하다. 이 뼈아픈 지적을 깊이 새겨야 한다. 내면이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번 비슷하게 반복하는 상투성의 상상력이 아니라 구체성이 담긴 창의성의 상상력이 요구된다.

진보란 자신의 오늘을 부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오늘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혁신하여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내야만 겨우 진보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고, 노동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를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를 정체성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욕망의 형태는 보수를 넘어 수구와 완벽하게 닮아 있는 진보 행세주의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좌파 보수도 못되는 좌파 수구에 가깝다. 아직도 노무현이 봉하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논둑길을 달려가고 있다면, 어쩌면 요즘 보여주는 진보의 풍경에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를 부정하는 것은 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럴 듯한 표정과 말로 세계를 기만하는 위선자, 진보적 허명에 우쭐대는 자, 자기기만으로 영혼을 폐허로 만들고 그것을 모르는 자, 진보적 가치보다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비겁도 불사하는 자, 작은 권력을 성취하기 위해 종파와 지분에 몰입하고 있는 자, 무엇보다도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술수도 서슴지 않는 자,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정체성이라는 장벽 뒤에 숨은 자가 바로 라고 인식하는 것은 남북의 평화적 통일보다도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를 인식했다고 해서 를 부정하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다. ‘진보라는 명칭은 아편처럼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의적 상상력은 나의 오늘을 부정해야겨우가능해진다.

노무현의 질문을 무덤에 봉인하는 것은 노무현이 꿈꾼 나라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깊은 성찰과 학습 그리고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합적 사유를 통해 구체성 있는 답변을 노무현과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또한 교육과 복지, 일자리 창출로 답변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그에 대한 해법 역시 노무현의 질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