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진보’
- [한겨레 기고] “재벌이 고쳐지고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면 개혁은 다 되는 것일까?”
김용익 한국미래발전연구원장

두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렌-마이드너 모델’이라고 불리는 이 방안은 같은 성격과 가치의 노동에 대해서는 같은 액수의 임금을 주어야 한다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수립하는 역사적 전기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숙련도가 같은 간호사는 어느 병원에서 일을 하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월급을 같이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연대임금’이다.
그 후 스웨덴에서 임금격차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임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허약한 기업은 정리되고, 반면 튼튼한 기업은 살아남아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하게 되었다. 조건이 좋아진 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오일쇼크가 닥친 1970년대까지 20여년간 스웨덴 경제는 고속성장을 이어갔다. 결국 노동자들은 직장을 옮겼을 뿐 일자리를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용률은 더 늘어났다. 성장과 분배, 경제와 복지가 동시에 좋아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업들이 법을 지키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조건이 있었다. 실업수당을 강화해서 실직의 어려운 시기를 넘기게 하고 직업능력훈련을 제공하여 노동능력을 키워주는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새삼스럽게 60년 전의 스웨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한동안 ‘보편적 복지’가 떠들썩하더니 이번에는 ‘경제민주화’가 화제다. 민주통합당이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고 강령을 고치더니 한나라당도 복지국가를 강령에 써넣겠다고 한다. 민주당의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가 방대한 분량의 대책을 내놓자 급기야 한나라당도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좋은 일이다. 재벌을 다스려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미루고 미루기만 하던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다니…. 이러다가는 정말 나도 죽기 전에 복지국가에 잠시라도 한번 살아볼지 모르겠다.
그런데 재벌이 고쳐지고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면 개혁은 다 되는 것일까? 아니다. 경제개혁·복지개혁에는 반드시 노동개혁이 있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이루게 하면 노동의 격차도 쉽게 줄어들까? 대기업에 노동시간을 줄여서 고용을 더 늘리라고만 하면 일자리도 순탄하게 늘어날까? 불가능할 것이다. 대기업의 양보란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이기도 하고, 정규직의 양보란 정규직 임금이 적게 늘어남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가 하청업체·납품업체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지 않는 한,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몸을 던지지 않는 한, 경제개혁도 복지개혁도 좌초될 것이다. 이건 정부의 일도 재벌의 일도 아닌 우리의 임무다.
자기 기업의 노동자들끼리만 뭉치는 기업별 노조를 버리고 산업별 노조로 큰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영세노동자들끼리 노조를 조직하고 교섭력을 키울 가능성은 없다. 강력한 대기업노조와 무노조 상태의 영세노동자 간 교섭력 차이가 양극화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노동운동은 모르는 것일까?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몸부림치는 오늘, 진보가 정의롭다면, 진보가 도덕적이라면, 진보가 능력이 있다면, 25년 전 노동운동을 시작하던 그 처음의 대의를 되찾아야 한다. 진보는 어려운 사람을 먼저 품어주어야 한다. 진보는 따뜻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진보에 고마워하고 진보라는 말에 행복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진보’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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