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는 글 -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양정철 전 비서관을 처음 만난 것은 노무현대통령의 홍보수석으로 발령받아 처음 청와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그와의 첫 만남은 노무현대통령이 만들어 주었지만 그 이후 그는 노무현대통령과 나를 이어주는 단단한 인연의 끈이 되어버렸다.
사실 청와대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로부터 가장 이야기를 많이 들은 이야기가 양비서관에 대한 것이었다. “홍보수석실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이니 조심하라”는 조언에서부터 “가능하면 다른 곳으로 보내라”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다행인 것은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좋은 평은 믿지만 그렇지 않은 평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별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비서관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매우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물론이고 언론분야도 생소한 내게 양비서관은 경험 많은 선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그는 친절했고 깍듯했다. 그리고 충심으로 나를 보좌해주었다. 나는 그를 믿고 의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대통령이 양비서관을 국정홍보처로 보낼까 물어보셨다. 아마도 오랜 선임비서관 경력의 양비서관 때문에 여자수석인 내가 휘둘릴까봐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나는 펄쩍 뛰었다.
“양비서관 없으면 저 어떻게 일하라고 그러세요?”
나의 반응에 대통령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랬다. 양비서관은 아이디어가 번득였고 많은 일처리를 단시간 내에 해 냈으며 정말 성실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국내언론보도를 정리분석해서 올려야 하는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일할 때에는 수원인 집에 갔다 올 시간이 부족해 청와대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잔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늘 아침 일찍 출근해 있었고 일이 그의 손에 들어가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른 듯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글을 잘 썼고 또 빨리 썼다. 당시에 블로그가 막 선보이기 시작할 때라 청와대 블로그가 처음 만들어졌다. 나는 글을 많이 쓴 편이었지만 별로 부담이 없었다. 양비서관이 검열(?)을 했기에 그에게 내 글을 던져 주기만 하면 마음이 놓였다.
양비서관은 내가 마음이 여려서 말하기 곤란해 하는 것, 험한 일, 궂은일에 한 번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가 참여정부를 위해 언론과 전면에서 싸우는 악역을 담당했기에 밖에서 나쁜 소리를 많이 듣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중엔 나도 같은 처지가 되다보니 우린 동병상련으로 많이 통했다.
대통령이 봉하에 내려가신 후 참모들과 책을 쓰고 싶어 하셨다. 봉하에 가깝게 사는 부산 참모들은 몰라도 수도권 참모들은 봉하에 내려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양비서관은 당시 총선에 출마할 꿈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내려오라’는 대통령의 말씀 한 마디에 가족을 수원에 두고 홀로 봉하에 내려갔다. 우리는 그래서 ‘양정철은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라고 부른다. 그는 정말로 충직한 참모였다.
양비서관 덕분에 나는 대통령과 자주 만나 책과 관련해 많은 대화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봉하에 가보니 양비서관은 동네 아줌마들에게도 인기 ‘짱’이었다. 그는 술자리에서의 유쾌함으로 봉하마을 주민들 사이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덕분에 우린 봉하에 가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뉴스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을 맞았을 때, 나는 양비서관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다들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는 장례 실무책임을 맡아 침착하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남편은 지금도 양비서관만 만나면 눈물부터 쏟는다.
양비서관이 초대 사무처장을 맡지 않았다면 노무현재단이 그렇게 일찍 설립되고 자리를 잡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모 1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은 참으로 많은 행사를 기획했다. 재단 운영위원들은 걱정이 되었다.
“이 많은 일들을 정말 다 할 수 있겠어요?”
우리의 생각은 기우였다. 재단 직원들은 ‘사람은 죽도록 일해도 죽지 않는다’라고 양 처장이 사무실에 써붙인 격문을 봐가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양처장의 리더십이 큰 기여를 했다. 양 처장은 터프한 외모(?)와는 달리 부하 직원들에게 매우 다정다감하고 곰살맞다.
1주기 추모행사에서 드럼을 치면서 전국순회공연을 다니며 우리는 또 다른 인연을 이어갔다. 양 처장은 ‘사람사는세상’ 프로젝트 밴드의 로드매니저였다. 사실 <사람사는세상> 밴드를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추모음악회에 출연을 약속했던 연예인들이 이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하나 둘 출연약속을 취소하자 그가 아예 각계 명사 선배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자고 한 것이었다. 지금도 탁현민 감독 이하 밴드 멤버들은 양 처장의 연결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여름 외국에 있는데 양비서관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직을 사임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바닥은 다져졌으니 이 시점에 새 사무처장이 와서 도약할 때라는 것이다.
“어떻게 나하고 상의도 없이 이렇게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 있어요?”
나의 볼멘소리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다른 사람은 다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석님이 반대하시면 그만둘 자신이 없어서요. 하지만 제가 새로 시작하는 일을 수석님이 들어 보시면 아주 좋아하실 거에요.”
그랬다. 그는 1인 언론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우리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가 쓴 글을 트윗에 올리면서 나는 소개 글을 이렇게 적었다.
“니들 다 주거쓰, 양정철이 입 열었다.”
그렇다. 그는 참여정부 5년의 산증인이다. 홍보수석실의 터줏대감으로서 언론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도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다. 그의 이런 경륜과 지혜가 양절철닷컴을 통해 널리널리 퍼져나가기를 기대한다. 그는 노대통령과 나를 이어주는 끈일 뿐만 아니라 수백만 독자와 노대통령을 이어주는 소중한 끈이 될 것이다.
양정철은 노무현대통령의 영원한 참모이기 때문이다.
http://www.yangjungchul.com/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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