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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싸움 남았는데 '와각지쟁' 안된다 ...강기석

똘돌이 2012. 4. 17. 22:00

더 큰 싸움 남았는데 '와각지쟁' 안된다


 

나는 4.11 총선의 결과가 분하다. ‘참패’란 평가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야권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반을 차지하면 당장 새 국회에서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라고 촉구할 생각이었다. 더 급한 것이 방송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응급조치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KBS·MBC·YTN·연합뉴스에 대한 청문회 등 언론독립을 위한 아주 원론적인 조치들이 하루빨리 국회에서 다루어지길 기대했다.

밖에도 하고 많은 해야 할 일들이 있겠지만 우선 공직선거법 제250조(허위사실공표죄), 형법 제307조이하(명예훼손) 등을 개정해 정봉주 전의원을 구출해 내야 한다는 주장도 할 참이었다. 공직선거법을 고치는 김에 ‘후보자 사후매수죄’를 규정한 제232조도 손 봐야 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이끄는 교육개혁의 운명이 이 터무니없는 법규정에 걸려 경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간절한 소망들이 허무하게 무산된 이유가 민주통합당 등 야권의 무능에서 비롯됐다는 소리가 높다.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을 졌다고 비난한다. 심지어는 국민이 차려 준 밥상을 스스로 걷어 차버렸다는 험한 비유도 등장한다. 당연히 야권, 그중에서도 민주통합당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쏟아진다. 발빠르게 여론에 편승한 몇몇 당내 인사들은 재빨리 당 지도부 책임론을 들고 나와 결국 한명숙 대표를 끌어 내렸다. 

한명숙의 희생…질 수 없는 게임을 졌다?

정당대표가 총선에서 승리를 이끌지 못했다면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언제나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참패했다면서 한 사람에게 몽땅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번 총선을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못박아 규정했는가.

이명박 정권이 너무 잘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4대강이나 한미FTA, 제주해군기지건설 등 정책문제 말고도 친인척비리, 국가권력을 동원한 민간인 불법사찰 등 정권의 범죄행위가 눈앞에서 까발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정상국가라면 이런 범죄행위를 국민이 단죄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만들고 이끈 새누리당이 한나라당의 DNA를 그대로 이어받은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현명한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므로 새누리당이 이기면 MB정권의 불법행위들이 흐지부지 덮어지고 부자정권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는 혜안을 국민들도 공유하고 있을 터다. 이 모든 믿음과 기대들이 야권 ‘총선필승론’의 근거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야권연대만 센 줄 알았지 정권과 의회권력-재벌-검찰-군-고위관료-거대 교회-사학재단과 이들의 나팔수를 자임한 <조중동>과 관제방송 등 언론권력이 똘똘 뭉친 수구기득권연대의 위력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를 당당하게 외치는 정서, “나는 컴컴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특수계급”이라는 의식이 특정 지역에 여전히 완고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멀지도 않은 2000년 국가부도 직전의 사태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에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을 선택했던 ‘이상한 민심’의 존재를 벌써 잊어 먹었다.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된 수구기득권연대는 가히 검은 것을 흰 것이라 우기고 사슴을 말로 둔갑시키는 지모와 괴력을 가졌다. 이명박정권의 불법과 부패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더욱 똘똘 뭉치는 강고한 결집력을 과시했다. ‘불법사찰’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김용민의 ‘막말’과 싸잡아 ‘잡소리’로 치부해 버리는 배짱(조선일보)도 겸비했다.

“박근혜로 바꿔도 정권교체” “말바꾸기하는 야당을 심판해야” 등등의 억지소리를 전혀 부끄러움 없이 내뱉는 천연덕스러움도 무기다. 반면 ‘논문표절’ ‘성추행의혹’ 등 자신이 불리한 것은 그냥 묵살해 버린다. 야권지도부의 무능력보다는 수구기득권연대의 이런 ‘장점’들이 새누리당 승리의 비결임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궤변, 억지논리를 힘과 배짱으로 밀어붙인 수구기득권 연대의 괴력

나는 민주통합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판은, 이런 강고한 수구카르텔에 맞서서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모색해 나아가는 시발점으로써의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질 수 없는 선거를 졌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의 막무가내여서는 안 된다. 그건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자신의 실력마저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다.

수구기득권세력은, 꿀단지에 모여드는 개미떼처럼, 이명박을 버리고 미래권력 박근혜 주변으로 계속 꼬여 들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이념이나 정의가 아닌 이익을 좇는 부류인 바 이제 이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도 잽싸게 빗자루를 들고 공주님의 대선행차길에 앞장 서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견제에 여념이 없던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마저 이젠 모든 걸 포기하고 그의 치마폭에 숨으려 작심한 듯 하다.

단언하거니와 나는 박근혜 위원장이 이렇게 세를 불리는 한편으로 오래 전부터 일단의 참모그룹을 측근에서 은밀하게 가동시켜 왔다고 믿는다. 이 그룹의 작동방식은 다음과 같다.

수천명의 표본집단을 정해 놓고 수시로 여론조사를 벌여 민심의 동향을 파악한다. 그 결과를 수십명의 박사급 인재들이 분야 별로 분석해 여러 대안을 내놓는다. 여기에 다시 극소수 최측근들이 최적의 방안을 선택하고 이를 정교하게 다듬을 것이다. 이 그룹은 최소한 미국 클린턴의 딕 모리스, 부시의 칼 로브, 오바마의 람 이메뉴얼 급의 탁월한 전략가가 이끌고 있을 것이며 그는 24시간 박 위원장의 곁을 지키면서 옷입는 법, 화장하는 법까지 전문가를 동원해 코치할 것이다. 박 위원장은 이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어떤 돌발사태가 발생해도 이 측근그룹이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일체 입을 다문다.

이제 이 그룹이 당의 공식조직까지 접수할 것이며 그 결과 수구기득권연대라는 기계는 대선가도에서 더욱 힘차게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안에서 김종인, 이상돈 정도의 인물들은 한낱 장식품 역할에 불과할 뿐이며, 저마다 박근혜의 멘토를 자임하며 날뛰기 시작한 <조중동>마저 두뇌역할은커녕 손나팔 정도의 대접을 받을 것이다.

힘 불린 수구기득권 연대, 더 힘이 세졌는데..

이에 비해 야권의 실력은 총체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야권의 어느 정파도, 심지어 민주통합당이란 거대 정당마저도 어떤 일관되고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이젠 그나마 몸집을 좀 불렸다해서 당내 헤게모니를 다투는 파벌싸움이 본격화하는 것 같다. 물론 대선후보 경쟁을 염두에 둔 경쟁일 것이다. 그건 정치세계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대선후보 경쟁이야말로 멀리 보고 크게 가야 한다. 누가 봐도 될 수 있는 인물을 뽑아 합심해서 도와야 한다. 이미 끝난 총선결과를 두고 공천이 잘못됐다, 전략부재다, 리더십이 약했다며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경쟁을 시작하는 건 좀 부끄럽다. 그런 것들이 복합작용을 해 수구기득권세력과의 대결에서 전반적으로 힘이 모자랐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책임은 저마다 제 사람을 밀어 넣으려고 아우성치던 모든 세력, 저마다 자기 세력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암투를 벌였던 모든 세력이 나누어 져야 할 책임이지 특정 정파를 지탄하기 위한 이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한명숙 대표가 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더 큰 싸움을 8개월여 앞둔 지금은 패배의식에 젖을 때가 아니라 총선에서 나타난 부족한 점을 추스르고 심기일전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할 때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렇게 내려 놓았다고 한다. 타고 난 결벽증이 직동한 탓이겠지만 쉽게 싸움에 나섰다가 너무 쉽게 물러 서기까지 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정작 큰 싸움은 따로 있는데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이들을 가리켜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격(蝸角之爭)’이라고 놀린다. 궁색해지면 제 몫이나 찾아야겠다는 패배의식의 발로다. 상황은 아직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의석수는 157-140으로 부족하지만 민심은 48% 전후로 정확히 맞서고 있다. 수구기득권세력의 그 막강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강기석/홈페이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