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념의 ‘앙시앙 레짐’을 타도하는 쪽이 이긴다. ...김대호
먼저 이념의 ‘앙시앙 레짐’을 타도하는 쪽이 이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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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몸이 노화(老化) 된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한국사회는 식민, 전쟁, 기아, 정치적 폭압 등 잔혹한 억압, 박탈, 결핍의 경험과 개인적, 집단적 성공 신화(산업화, 민주화, 자유화 등)로 인해, 또 분단으로 인해 1950년대와 1980년대에 형성된 생각의 기본 틀이 의외로 강고하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대립, 갈등이 많다. 한국 보수를 떠받치는 열성 지지자와 주력 세대들의 뇌리에 박힌 생각의 기본 틀은 좌익과 우익, 북한과 남한, 안정=독재와 혼란=민주, 개방 경제와 폐쇄 경제의 대결 구도가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생각이 경화된 노인들은 현재의 야권과 여권, 진보와 보수의 대립 구도를 과거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본다. 야권 및 진보와 과거 좌익과 유사점을 적지않게 찾아낸다. 적화 통일이나 연북 통일에 대한 공포도 잦아들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는 친북, 종북, 좌파 시비의 근원은 이것이다. 이 중에서 생각의 경화가 좀 심한 분들이 바로 태극기, 성조기를 휘두르고, 애국가를 부르며, 진보 단체의 집회를 폭력적으로 훼방 놓는 사나운 노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엽기적인 행위는 1950년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천만 배는 나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중년, 청년 좌파들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런데 오래 전에 유효성이 다한 생각의 기본 틀을 재개발, 재건축하지 않으므로 서 일어나는 패악은 일부 노인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들과 동렬에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197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의 꽤 성공적인 학생운동, 노조운동, 농민운동, 교수•교사•언론 운동 등을 통해 생각의 기본 틀이 형성된 중년 세대들의 문제도 여간 심각하지 않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신화를 창조하였고, 지금도 민주•진보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중년들의 뇌리에 박힌 주된 대결 구도는 친일, 친미 부역세력과 그 후예들인 독재, 매판재벌 세력과 민주, 민중, 자주 세력의 대결이다. 자본과 노동의 대결도 바로 그 뒤에 있다. 이렇게 생각이 굳어진 사람에게는 노조가 주창하는 가치, 즉 정리해고 반대, 노동 유연화 반대, 고용안정, (여건이 허락하는 한) 신의 직장 만들기는 정의고 선이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등 모든 억눌린 자들의 권리•이익추구도 선이다. 탈권위, 분권, 자율, 참여 등 민주적 가치들도 다 선이다. 시장, 개방, 경쟁, 유연화, 친미 등에 전향적인 태도는 보수의 것이고, 그 반대는 진보의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청년들과 상식인들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래서 지금은 많이 약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생각의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도 있다. 그것은 선과 악, 아군과 적군, 대한민국의 성장과 통합을 가로막는 원흉이 자명하다고 보고, ‘문제는 힘’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99%' 혹은 ‘선’ 들간의 연대, 연합, 통합과 대중 참여를 최상위 가치로 놓게 한다. 실제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야권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가치는 바로 이것이다. 총선,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전술(주로 투쟁노선)은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5천만이 사는 거대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단적으로 고용률을 어떻게 올리고, 산업경쟁력을 어떻게 제고할지 등은 뒷전이다. 실제 내놓는 대안(비전)도 너무나 부실하다. 하지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야권은 은연 중에 저들이 하는 나쁜 짓만 안하고, 권능은 아래로 내리고(탈권위, 분권, 자율), 도덕적 신뢰 위에서 각계각층과 널리 소통하고, 공무원의 양심과 능력을 믿고, 복지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면 진보의 태평성대가 열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의 고용, 산업, 교육, 공공, 부동산,
양극화, 일자리부족, 과도한 경쟁과 불안 등을 15년 전부터는 신자유주의에 돌리는 것이 유행이었고, 작년 월가 점령 시위 이후에는 "1%"에 돌리는 것이 대유행이다. 하지만 그 실체가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1%와 99%를 대립시키는 논법은 모순부조리를 너무나 피상적으로 바라본다. 단적으로 고단할 수 밖에 없는 산업구조와 크고도 불합리한 근로조건 격차(노동시장의 이중구조)라는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한다. 조선 말기로 치면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억누르는 전근대적 신분 제도와 후진적 사상, 문화, 리더십 전반이 문제의 핵심인데, 단지 세도정치를 일삼는 왕실 외척만 문제 삼는 격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왕실 외척은 실체가 분명하고, 이들을 타도하면 대원군 같은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라도 들어설 수 있는데, "1%"는 그 실체도 불분명하고, 기껏해야 변칙편법 상속과 불공정거래 엄단하고, 세금 좀 더 걷는 수준의 대안을 내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역시 필요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을 하나같이 불행하게 만든 대한민국의 강고한 모순부조리가 "1%"를 때려잡는 정도의 개혁으로 해결이 될까?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의 몰락, 북한의 참상(체제 경쟁의 완전한 승리), 노조운동의 짙은 그늘, 나름대로 민주적 가치를 견지하려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일 하나는 잘 하리라 믿었던 CEO 출신 이명박 정부의 좌절과 실패는 구도심 재개발을 요구하는 이념적, 정치문화적 대화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물이 된 구도심을 새로운 도시로 변모시키려는 움직임은 약하다. 이들의 한계, 오류에 대한 깊은 성찰은 빈곤하다. 대한민국이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2012년 한국 진보진영(야권)의 핵심 화두는 반MB, 반FTA, 통합, 참여, 연대, 승리일 뿐이다. 지난 25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새로운 국가비전과 국가경영 실력은 전혀 화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진보와 보수의 핵심 문제다. 먼저 이념의 '앙시앙레짐'을 재건축하는 쪽이 이겨야 하고, 이길 수밖에 없다. 안철수 현상을 낳은 심상찮은 민심이 그 뚜렷한 징표이다. ※이 글은 <한국일보> 2012.1.11자 칼럼 "아침을 열며"에 쓴 글을 보완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