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위기관리, 참여정부에서 끝났다”
“국가위기관리, 참여정부에서 끝났다”
- 전 NSC 사무차장 류희인 장군… 위기관리 생생한 뒷이야기 소개

지난 23일 저녁 서울 합정동 <노무현재단>에서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이 연사로 나선 네 번째 ‘대화마당’이 열렸다. '참여정부 위기관리, 그 해법과 뒷이야기를 듣다'란 주제로 류 전 차장은 참여정부의 국가위기관리시스템 도입과정,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실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이야기들로 대화마당을 풍성하게 이끌었다.
이날 대화마당은 ‘국가 위기관리’라는 딱딱한 주제였지만 2시간에 걸친 강연이 끝나자 30여명의 참석자들은 큰 박수와 함께 환호와 탄식을 동시에 쏟아냈다. 참여정부 위기관리 시스템의 ‘품격’에 대한 환호와 그 ‘품격’이 무너진 것에 대한 탄식이 교차한 것이다. 특히 2003년 남부지방을 휩쓴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은 후 제정된 ‘기상관측표준화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잠시 경탄의 술렁임이 일었다.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면서 참석자들은 가까운 벗이나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한 참석자는 “공무원인 남편이 왔다면 업무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됐을텐데”라고 말했다. 참석자 중 현직 기자도 눈에 띄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는 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명박 정부는 구제역 위기관리에 왜 실패했나’를 보고 참석했다고 한다. 국방부 출입처 기자인 그는 “우선 대화마당의 열의에 상당히 놀랐다“며 ”그동안 류 비서관을 왜 주요 취재원으로 안다뤘는지 안타깝다“고 전했다.
국가 위기관리에 대한 참여정부의 철학을 씨줄로 류 전 차장이 청와대 근무 시절 겪은 생생한 경험과 에피소드들을 날줄로 엮어 이번 네 번째 대화마당을 요약한다.
국민의 일상사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
참여정부는 외교․안보․국방․대형재난 등에 한정된 전통적인 국가안보에 대한 개념을 국민의 일상적인 활동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혁신하고자 했다. 이런 배경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모든 분야를 다 안보 영역으로 포괄하고자 한 참여정부의 국정철학이 있었다. 강연 초반 류 전 차장은 참여정부 인수위 시절 벌어진 일련의 두 가지 대형 사건을 꺼냈다.
“참여정부 출범 한 달 전쯤인 2003년 1월 15일 소위 인터넷 대란이라고 하는 사이버 마비사태가 서울 혜화동 전화국을 기점으로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금융, 통신, 항공권 예약 이런 것들이 올스톱 되어 나라 기간망이 일시에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2월 18일, 정부 출범 약 1주일 전에는 대구 지하철에서 180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화재로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참여정부 출범 전에 연이어 일어난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우리 정부 내에는 새로운 국가위기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노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2005년 참여정부는 국가위기를 모두 33개로 유형화 해 그에 따른 표준 매뉴얼 33권을 작성했고 정부 272개 부처와 관계된 280여개의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만들었다. 또 위기 현장에 투입되는 기관과 조직들이 현장에서 해야 될 세부적 조치들을 일일이 규정한 현장조치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모두 2400여 권에 달했다. 이렇게 방대하고 구체적인 규정을 만든 것에 대해 류 전 차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 개의 대형 재난에는 통상 9개의 정부부처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피살되면 일단 주무부처는 외교부다. 하지만 시신 처리에 관한 것은 보건복지부 소관이고, 국내로 시신을 운구하는 책임은 행정자치부가 맡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니 책임이 많이 따를 것 같고 비판이 따를 것 같으면 서로 가능하면 안 하려 하고, 뭔가 좀 면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으면 서로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정부 수립 후 60년간 반복된 현상이었다. 과거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돌아보면 정부의 대응은 한 마디로 우왕좌왕, 중복, 공백이었다. 어떤 것은 꼭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어떤 것은 서로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이런 혼란의 근본 원인은 부처간의 역할과 기능이 정확하게 규정이 되어 있지 않아서다. 정부조직법에 환경부는 뭐한다, 보건복지부는 뭐한다 이런 식으로 느슨하게만 규정을 하고 있어서 특정위기에 대해서는 대처가 미흡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실무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이다.”
“매뉴얼을 통해 안 하면 누가 안 했는지 왜 안 했는지, 무엇을 안 했는지 금방 드러나게 된다. 감사원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이 누구의 책임인지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절대 공무원들이 허술하게 취급하지 않는 효과가 생겼다”
류 전 차장은 강연 중반 이런 말로 국가위기관리에서 정부의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강조했다.
“국가위기관리도 결국은 철학과 사상의 문제다. 참여정부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명 손실이나 아픔을 우리 아픔으로 여겼다. 그래서 국가가 어떤 비용을 들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온갖 고민을 하고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성과만 중요시하는 이명박 정부는 위기관리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그 차이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바꾼 ‘을지연습’
참여정부는 매뉴얼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공무원들이 실제 훈련을 통해 적용해 보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2년에 한 번씩 보완하게끔 했다. 특히 류 전 차장은 주도해 1968년 1. 21사태 이후 대북 전시용 훈련으로 꾸준히 유지되어온 '을지연습' 프로그램에 ‘위기대응 통합연습’을 넣은 뒷이야기를 밝혀 눈길을 모았다.
“제가 청와대 있을 때 소리 소문도 없이 바꾼 게 있다. ‘을지연습’은 참여정부가 들어오기 전 전시대비용 훈련이었다. 그런데 2005년부터 훈련기간 5일 중 2일을 중 대민보호 프로그램인 ‘위기대응 통합연습’을 넣었다. 아마 당시 알려졌으면 보수단체에서 난리나지 않았을까. 이것은 지금 이명박 정부도 못바꾼다.”
참석자 모두 인상 깊었던 이야기 ‘기상관측 표준화법’
대개의 참석자들 대부분은 기상관측 표준화법을 만든 과정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고 평가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남부지방을 덮쳐 엄청난 피해를 냈다.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는 컸다. 부산항의 대형 크레인이 다 쓰러지고, 해안가에 해일이 덮쳐 건물 지하 노래방에 있던 사람들이 사망했다.
태풍 경로를 오보한 중앙기상청이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 사건 외에도 당시 중앙기상청은 잦은 오보를 내 국민의 불신을 샀다. 오죽하면 중앙기상청이 야유회 가는 날 비가 왔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내가 공군장교 출신이라 기상에 매우 민감하다. 현역시절 매일 아침 기상장교가 브리핑을 해주었다. 대개 거의 정확했다. 그런데 중앙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자주 빗나가 참 의아했다. 태풍 매미가 덮쳤을 때 상륙시간도 한 시간 어긋난데다 경로도 한참 벗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해 공군 쪽에 문의해 보니 그쪽은 정확하게 예보를 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파악해 보니 군 외에도 민간 기구까지 포함하면 16개 기관이 일기예보를 할 수 있는 기능이나 분가를 보유하고 있었다. 각 관계자들을 소집해 상황을 파악한 결과 각 기구가 서로 정보를 교류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기상관측기구가 호환이 안되거나 단위 자체가 다 다른 문제점이 있었다. 그 조치 결과 2005년 12월, 각 기관 정보 교류와 표준화에 중점을 둔 '기상관측표준화법'을 제정했다. 그 이후 기상예보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
“참여정부 무시가 구제역 대재앙 초래”
강연 막바지에 류 전 차장은 이명박 정부의 구제역 관리 실패를 우선 “참여정부의 경험과 제도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며 “기본절차 미준수, 국정운영 미숙, 콘트롤타워 부재, 윤리철학의 부재”를 근거로 들어 설명했다. 최근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발언을 인용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정부는 안보, 통일, 군사, 외교 분야만 남기고 나머지 재난 분야, 핵심 기반 분야는 각 부처로 다시 돌렸다. 부처로 돌려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한마디로 정부 차원의 위기관리를 할 수가 없다. 구제역도 마찬가지다. 행자부에서 구제역과 관련해서 뭘 할 수가 있는가? 농림부 주관 사항인데, 행자부에서 무슨 지시가 되겠는가? 또 행자부에서 말한다고 해서 전문 부처인 농림부가 말을 듣는가? 농림부가 병력 요청을 국방부에 해도 국방부가 말을 들었나?”
“얼마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우리는 매뉴얼대로 했다'고 했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다. 신고를 접수한 직후 초기단계에 정확하게 매뉴얼을 적용해서 규정된 조치들을 취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최초 발생 농가에 드나든 분뇨차, 수의사들이 전국 80군데를 돌아다니지 않았나? 전국에서 300만두가 넘는 가축들을 이미 살처분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위기관리 매뉴얼 운운하나?”
류 전 차장은 “모든 형태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적극 보호하기 위한 국가 위기관리는 참여정부에서 시작해서 참여정부에서 끝났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네 번째 ‘대화마당’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