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님의 글... 민주주의의 관용과 상대주의
09.03.01 민주주의의 관용과 상대주의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기간 중에 ‘사람세상’에서 잠시 그 분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놓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상대주의 철학과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관용의 문화에 관한 저의 생각을 몇 자 적어봅니다.
논쟁은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저의 조문 문제로 시작되기도 했습니다만,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논쟁의 주제는 김 추기경님의 행적에 대한 평가로 모아졌습니다. 논쟁을 보면서 우선 저는 저의 홈페이지에서 그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일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다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철학과 원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생활화 하고 있거나, 그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대세를 따라, 또는 편리한 대로 그냥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비율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비율에 따라서 오늘날 각국의 민주주의가 수준이 다르듯이, 장래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수준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상대주의’입니다.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은 상대주의 철학에 기초하지 않고는 설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현명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평등이 설 수가 없을 것이고, 어떤 생각은 옳고 다른 생각은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누구도 다른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평등을 전제로 하는 보통선거라는 제도도, 사상의 자유도 용납이 될 수가 없으니, 민주주의는 설 땅이 없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역사에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복종하지 않거나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을 그 사회에서 배제해 버리는 끔찍한 일들을 당당하게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용’입니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귀결이기도 하고, 상대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통합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소극적 의미로 보면, 관용은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각이 다르다 하여 타도하고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민주주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관용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에는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함께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관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면서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 하여 이를 방치한다면, 공동체는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통합하고 이를 이루는 방법에 관하여도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흔히 이런 경우에 대비한 민주적 과정으로 다수결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수결은 결코 만능의 방법이 아닙니다. 다수결로 결정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하여 도저히 납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다수결 자체를 반대하거나 다수결의 결과에 대하여 승복하지 않고 협력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이런 경우에는 결과를 실현하기도 어렵게 되고,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통합에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제 민주주의 과정에서는 다수결로 결정을 하기 이전에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설득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서 다수결에 붙일 수 있는 안을 다듬어 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쟁점은 합의를 이루게 되고, 일부 합의가 되지 않은 쟁점이라 할지라도 충분한 토론과 조정이 이루어지면 다수결 절차에 합의를 이루게 되므로, 표결의 결과에 흔쾌히 승복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적극적인 방해는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핵심 원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입니다.
민주주의에 필요한 관용은 바로 이런 의미의 관용이라야 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방임하는 수준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다름을 상호 수용하여 이를 공동체의 가치와 이해관계로 통합할 줄 아는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의미의 관용을 적극적 관용이라 말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에서 민주주의를 배웠고, 독제 체제의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체득했습니다. 반세기 동안 민주주의를 위하여 끈질기게 싸운 끝에 마침내 승리했고, 그로부터 20년 동안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민주주의 제도를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 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민주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특별히 걸음이 느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억압적인 지배체제에서 쌓은 기득권의 세력은 지난날의 체제에 향수를 가지고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 해진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낯설어하고, 지난날을 그리워하여 그에 동조하고, 반대로 오랜 동안 타협할 수 없는 가치를 놓고 싸웠던 사람들은 구시대의 체제와 문화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갈등의 과정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역사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 혁명 이후 왕정복고 운동이 사그라지기 까지는 80여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 그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제가 관용을 민주주의 원리로 들먹이는 것이 좀 성급한 일이거나 사치스러운 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관용의 문화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국가적 과제가 결코 만만치 않고 이들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량이 한 단계 더 발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21 ‘산소맨’이라는 사람이 ‘사람세상’에 올린 글을 보면 김수환 추기경이 보수적 성향의 발언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그 분이 민주주의를 배반했다고 말하거나, 그분을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수적 생각이나 발언은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분의 발언이 당연한 권리로 존중이 되어야 하듯이 그에 대한 비판도 당연한 권리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또한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분의 발언 내용에 대한 비판과 그분의 발언에 대한 인격적 비난은 달리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의 경우는 그분이 고인이 되셨고 장례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경우에 두 가지를 구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발언의 내용에 대하여 감정을 절제하면서 사실과 논리로서 차분하게 문제점을 지적해 나간다면 논리적인 비판이 될 가능성이 높고, 사실이나 논리를 생략하고 감정을 표현으로 하게 되면 인격적 비난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써놓고 보니 별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를 무슨 말장난처럼 복잡하게만 엮어놓은 것 같아서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민주주의와 관용의 문화에 관하여 꼭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후보시절부터 17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거듭 구상하고 말해왔던 동거정부의 구상은 기회를 잃어버렸고, 대연정의 구상은 무리했던 것이라 결국 패착이 되고 말았지만, 저는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관용의 문화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닌 줄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강정구 교수 문제나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서 민주주의니 관용이니 하는 것이 말로는 하기 쉬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로 정착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반대한 이유는 그것이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강정구 교수의 처벌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이유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정도의 발언은 용납되어야 할 자유이기 때문이었는데,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마저도 납득하지 않으셨으니 앞길이 얼마나 험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관용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용의 문화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우리 민주주의도 더욱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지루하고 딱딱한 이야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09.03.06 관용과 용서는 다릅니다.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라는 저의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촌평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관용을 용서, 포용 등의 뜻으로 이해하고 반성과 사죄가 없는데 용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글이 있었는데, 저도 그 글을 읽고 감성적으로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서는 제가 말한 관용의 의미를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관용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합니다.
우선 관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용서나 사면이라는 말과는 다르다는 점과, 관용의 역설, 관용의 한계 등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겠습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관용이라는 말이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는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온 말.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이렇게 되어 있고,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권위적인 명령에 의한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 ‘어떤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용납하는 것’ ‘국가의 정책으로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양의 관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관용’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말에 대한 사전적 해석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아마 관용이라는 사상을 접하고 다룬 역사와 문화가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해석을 따라야 할까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관용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 뜻을 서양 사전에 나온 해석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용은 용서나 자비와 같은 일방적 호의와는 다르고, 지배자의 통치 기술로서 사용되는 은사나 포용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한 관용이라는 말은 누구를 용서하고 안하고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나온 김에 관용의 역설과 한계에 관하여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관용을 극대화하면 관용의 사상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을 방관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절대주의 사상을 용납하여 민주주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와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스에게 무너진 것이 바로 그런 역사의 사례입니다.
그래서 전후의 독일 헌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 대하여는 관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의 한계, 내지 상대주의의 한계인 것이지요.
그러나 만일 이것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면 이들 자유를 심각하게 위태롭게 하여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상을 제한하는 경우에도 생각이나 말만으로는 처벌할 수가 없고, 행동의 경우에 한하여, 그것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험’이 있을 때 한하여,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한계에 다시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 보안법은 바로 이 한계를 벗어나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악법인 것입니다.
다시 김수환 추기경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일전에 제가 올린 글은 그 분이 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보수적 견해를 말씀하셨다 하여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보수적 견해도 그에 대한 비판도 ‘다름’으로 존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 관용의 원리이나, 비판은 논리로 해야지 인격에 대한 공격이어서는 관용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국가 보안법 까지 옹호한 발언을 하셨다는 내용을 보고, 그분마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참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저는 김용환이라는 분이 쓴 ‘관용과 열린 사회’라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책을 보면 유네스코는 1995년을 ‘세계 관용의 해’로 선포하고 그해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 28차 총회에서 ‘관용에 관한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관용이라는 것이 제가 위에서 소개한 뜻풀이 수준보다 훨씬 깊고 넓은 가치와 역할을 가진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용에 관한 교육에 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유학생 수학도가 올린 ‘노공이산님 글을 읽고’ 내용 중에 있는 추천 글 ‘왜 시민민주주의인가?’ 라는 글 중에 있는 다음의 대목은 눈여겨 볼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결국 프랑스와 독일이 공통적으로 도달하게 된 시민교육의 원칙들을 다시 보자.” -현재 정치 상황을 분석할 때 학생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독일) vs 스스로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체득한다 (프랑스)
시민교육에서 교화와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 (독일) vs 시민 의식은 다른 과목과는 달리 지식의 전수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09.03.06 관용의 한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관용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나 이치는 말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생각이라는 것도, 말이라는 것도, 그 경계를 분명하게, 그리고 앞뒤의 모순이 없게 설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관용의 한계’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관용의 한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시민이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재 권력과 투쟁할 때, 시민은 권력의 정당성에 대하여 관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절차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권의 행사로 정당화 합니다. 관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관용의 가치를 위하여 관용의 한계를 주장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권력은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리, 그리고 조용한 다수를 말하고 법치주의를 들고 나옵니다. 스스로 관용하지 않는 권력이 관용의 원리를 내세우고, 동시에 관용의 한계를 내세워 관용의 원리를 짓밟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80년대 전반, 우리나라의 공안 검사실과 법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런 우스꽝스러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으로 그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그 후에도 국가 보안법을 둘러 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관용의 원리는 누가 해석하고 누가 한계를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리만으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민주주의의 현실과 문화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과 문화는 오랜 세월 그 나라 시민이 축적해 온 결단과 선택의 역사 위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관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문제들은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냥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로 설명하면 될 문제를 왜 굳이 ‘관용’이라는 어려운 말을 꺼내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관용’이라는 사상의 역사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민주주의 사상의 요체를 보다 뚜렷하게 이해하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그 말이 필요하다 싶은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관용이라는 말이 느낌으로 딱 와 닿지도 않고, 실천하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시민이든 권력자이든, 가치와 이해관계, 사고방식이 충돌하는 모든 경우에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관용의 원리를 적용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극복하고 보다 통합되고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큰 밑천이 될 것입니다. 09.03.13. 상대주의의 보편적 가치
관용, 상대주의 이런 관념과 논리 이야기는 그만 하려고 했는데, 설명이 좀 부족했던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대주의 이야기를 좀 더 보충하려고 합니다. 사람세상 회원 한 분이 보내주신 글에 “저는 '상대주의 철학'은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와 개념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이 말하고자 하는 본론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논쟁을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논리를 한번 쯤 짚어보는 것은 상대주의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부족한 대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상대주의 철학이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 진리 또는 가치를 부정하고 절대주의를 반대하지만, 보편적 가치나 보편적 원리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절대주의는 다른 가치나 반대를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합니다. 그와는 달리 보편주의의 입장은 보편적 원리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다른 가치나 견해를 배척하고 억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편적 가치 또는 원리는 절대주의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상대주의의 가치는 적극적으로 상대주의 그 자체의 진리성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가치와 사상을 ‘반대는 하더라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태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로서 소중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상대주의가 스스로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에 관한 경우입니다. 민주주의 헌법에 관한 보편적인 이론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상이라 할지라도 사상의 수준에서는 자유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발전할 때에는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상대주의의 한계, 관용의 한계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엄밀하게 논리적으로만 말한다면 이것은 상대주의가 스스로 상대주의를 부인하는 모순에 부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순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철학적 기초가 모두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철학과 논리의 세계에서 가치와 사상, 법칙 이런 것을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이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원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성, 타당성, 이런 이론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뉴턴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불확정성의 원리, 상대성 원리 이런 이론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 혼란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확률과 통계적 보편성 이런 것이 과학적 원리로 통용이 되고 있다는 글을 읽고 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진리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런 사고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상대주의, 관용 이런 개념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상대주의니 관용이니 하는 말이 ‘동의하지 않지만, 반대하지만, 미워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의 권리로 인정하고, 인내한다. 나도 상대와 논리를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지만, 민주적으로 합의된 규칙에서 허용된 방법을 넘어서는 반칙을 하거나, 상대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원리를 이야기 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한 것 같습니다만, 이처럼 사상과 논리의 구조를 찾아가는 과정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 사이의 우선순위, 양보와 타협의 균형점, 그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과 태도 이런 것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사고의 연습으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민이 이런 사고에 익숙한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튼튼한 기초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용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지루한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용의 한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2009.03.06 22:12 | 노무현 | 조회 1271 | 추천 71 | 반대0 |
이제 관용에 관하여 해명이 필요한 이야기는 대강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마감을 하려고 합니다. 모두들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상대주의와 보편적 가치
2009.03.13 20:14 | 노무현 | 조회 330 | 추천 26 | 반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