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인 문제의식, 민주주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스나이퍼)
제가 <조선시대 선비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는데요. 일회성 글은 아닙니다. 오늘은 서양의 민주주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다시 조선후기에서 1948년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서양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제가 쓰게 될 글의 제목만 미리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까지는 아래 순서로 쓸 예정이지만, 쓰는 도중에 새로운 제목으로 새로운 내용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 선비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서양의 민주주의 형성과정,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 선비정신의 몰락과 천민자본주의의 태동
- 아메리칸드림의 지배와 유러피언드림의 도전, 세계화 이후를 모색하는 서양
-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길 잃은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
근본적인 문제의식, 민주주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제가 다소 관념적, 혹은 이론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글을 쓰는 이유를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함입니다. 큰 흐름에서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기는 요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부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대책이라는 것도 겉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양식’ 혹은 ‘삶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정치제도, 사회제도, 경제제도, 교육제도 등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제도는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흐름을 파악하여야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서양의 민주주의 발전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쓴 조선시대 선비들의 개혁과 좌절은 시기적으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있고, 이는 서양의 중세 봉건시대에 해당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조선 선비들의 민본주의 사상, 견제와 균형의 붕당정치,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시스템 등은 서양의 중세봉건시대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문명사적으로 보면 앞서간 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결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누가 우월하냐 여부를 따지는 비루한 수준은 넘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통도 있다는 점을 찾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실제로 선비들이 디자인한 조선이라는 국가는 서양의 봉건체제를 뛰어넘는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의 꿈과 이상이 현실에 실현되었던 세종시대만 놓고본다면 대단히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이 가동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는 국가가 형성되지 않은 봉건체제였고, 17세기가 지나서야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국가’가 태동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이니 하는 개념들이 서양사에 존재하지만, 그 국가는 관념적인 지배였을 뿐 ‘국가’라고 하는 하나의 통치체제로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질적인 통치는 각 봉건영주가 담당했고, 그 영주들 간의 패권다툼을 거쳐서 국가가 형성된 사실을 놓고 보면 결코 조선이라는 국가를 서양의 시각으로 쉽게 봉건체제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사농공상의 계급적 신분질서를 이유로 조선시대를 봉건체제로 규정하기도 합니다만, 서양의 경우에도 ‘투표’라는 제도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급적 차별이 20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투표행위를 통한 대의정치’가 민주주의 체제를 규정하는가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개개인의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가 바로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투표라는 장치가 없다면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방법은 없는가라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앞선 글에서 세종시대의 ‘공론정치’와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을 소개드렸습니다만, 투표라는 기술적 장치를 제외하고 본다면 결코 서양의 민주주의 제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론정치’는 소위 민심을 수렴하는 기술적 방법입니다. 토론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토론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쳐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지금 당장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미FTA 비준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면서 해당 상임위 의원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한나라당은 어떻게 볼 것이며, 상임위에서 의장석을 점거하는 야당의 행위는 어떻게 볼 것인가요? 다수 여당의 횡포에 맞서는 정당한 행위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가면 되는 것인가요?
오히려 세종시대의 공론정치가 훨씬 민주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요? 적어도 토론이 가능하고, 토론을 통해 이견을 수렴하는 과정, 양보할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진 조선의 선비들이 훨씬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요?
물론 투표라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구나 정치적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투표행위를 통한 다수결이 나찌즘도 만들어낼 수 있고,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듯이 오히려 소수의견을 말살해버리는 수준까지 치달으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껍데기만 존재하게 되고 투표라는 행위는 단순한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히려 투표행위가 없더라도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공론’이라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토론되고, 생각의 차이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된다면 이것이 민주주의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의 고민은 어떤 역사나 이론이든 교조적으로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본질’을 놓치지 않고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범위한 세계화의 진전으로 인해 미처 깊게 고민해보지 못한 문제까지 동시에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100만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각종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투표권이 없는 그들에게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는 것입니다. 투표권이 일종의 발언권이고, 투표행위가 발언권 행사라고 본다면 적어도 이민자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투표권은 없지만 그들의 의사를 공론으로 모을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그들이 의사표시를 할 수 있고, 그 의사표시가 우리 사회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면 비록 투표행위가 없더라도 민주주의의 본질에는 부합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이런 근본적인 의문들도 차차 풀어가 볼 생각입니다.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사고의 틀을 열어놓고 가야 할 것입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형성과정
(있다가 오후에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회사 업무와 병행하느라 집중하지 못하겠네요..회사에도 미안한 생각이 들고...오후에 나머지 내용 올려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