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사진 과 그림
여류화가 나혜석
똘돌이
2008. 12. 12. 11:28
- * 여류화가 나혜석 [1896 4 18 ~1948 ]호는 정월(晶月)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당시 나부잣집, 나 참판댁이라 불리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오빠 나경석의 권유에 힘입어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고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가 된다. 1914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나혜석도 그러한 지적 자장 안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유학시절에는 같은 유학생이던 오빠 나경석의 보호와
후원 아래 춘원, 염상섭 등과 교유를 맺는데 특히
당시 춘원과 함께 유학생 문단의 쌍벽을 이루던 최승구와는
장래를 약속한 애인 사이로 이 시기의 나혜석의 문필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1917년 애인 최승구가 폐병으로 요절한 후 한동안 비탄에 빠지지만
1919년 3 ․1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다.
이 시기의 나혜석의 면모는 김동인이 「김연실전」에서 방종한 신여성 송안나로 형상화시켰다.
이는 당시 그녀의 세 편의 논문에서 그녀가 다른 신여성들처럼
신 연애사상을 부르짖은 흔적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층을 대상으로 한 학식을 통한 실력배양으로 여권을 해방운동을 펼쳤다.
1920년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1921년에는 남편의
후원 아래 한국 화단에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23년에는 남편 김우영이 만주 한국인 무마정책의 일환으로
신설된 만주 안동현 부영사직에 임명됨에 따라 만주생활이
시작되며 1927년에는 일본 제국에서 은급으로 하사한
구미 시찰 길에 오른다.
1929년 귀국하나 파리에서 있었던 최린과의 밀회사실이 밝혀지면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다. 이혼 후 1938년 [해인사의 풍광]을 끝으로
문단에 종지를 찍는다. 이후 정신질환에 반신불수가 겹친 상태에서
양로원, 보육원을 전전하다가 1946년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둔다.
나부(裸婦)
깡깡
금상산 만상정
파리 풍경
블란서 마을 풍경
1928 스페인 국경
1933 인천 풍경
1933 선죽교
1935 별장
1935 화령전 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