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사회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兩是論)

똘돌이 2008. 12. 1. 15:04

 아이가 골목어귀 한쪽에 서 있다. 두 아이가 다투고 있다. 누군가가 던진 "지구는 어떤 모양으로 생겼을까?"라는 물음 때문이다 .   A는 둥글다고 대답했다. B는 넓적하다고 말했다. A와 B는 서로의 의견이 갈라지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C에게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라고. C는 머뭇거렸다. 누구 편을 들기가 난처하다. 마침내 고민하던 C의 대답은 '지구는 둥글넓적할 거야'였다.

C와 같은 대답은 '할아버지의 공평함' 일까? 아니면 '엉터리 수사법'일까? 이와같은
양시론(兩是論)은 문제의 본질을 규명하기보다 대립하고 있는 양쪽의 견해를 원칙없이 절충하여 결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A와 B라는 두 아이가 골목어귀에서 다투고 있다. A가 B의 손에 든 우유병을 손으로 쳐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B는 A의 가방을 발로걷어찼다. 지나가던 C라는 아저씨가 이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두 아이 모두를 막무가내로 혼을 냈다. 싸운다는 것이 이유다.

A와 B의 다툼에 있어 C라는 아저씨는 옳고 그름은 판가름하지 않았다. 둘 다 나쁘다는 결론의 집행자이기만 했다. C의 행위는 양비론(兩非論)적이다.

제가 왜 지금 양비론과 양시론을 얘기할까?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실천과제인 시민주권운동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도와 사회 구성원리로서의 민주주의가 이제는 사회 규범으로서, 그리고 각 개인에 내면화된 실천 규범이자 가치관으로 발전해서 자리잡아야 비로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각 개인의 실천규범이자 가치관으로 발전해 있는 서구 유럽 사회의 자녀교육의 방식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엄격하다. 두 아이가 싸울 경우 프랑스의 부모들은 싸움의 원인을 따져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규명하고 잘못한 점에 대해서만 야단을 친다고 한다. 우리와 다소 다른 점이다. 반면에 우리는 싸움을 했다는 자체를 탓하며 양쪽 모두를 벌을 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국회에서도 자주 본다. 어느 당이 국회법에 따른 절차를 무시하고 법안을 날치기통과를 했을 때, 당연히 국회는 난장판이 된다. 이럴 때, 우리 국민들은 쉽게 국회가 맨날 다툼이나 하니 나라꼴이 뭐가 되냐는 식으로 날치기를 한 쪽이나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쪽이나 싸잡아서 비난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국회법에 따른 절차를 지키려는 쪽도 여론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적당한 선이라는 게 생긴다. 엄밀히 얘기하면 국회법이 사장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다. 양비론적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자 하나의 예를 보자. 뉴질랜드에서 경험한 일화라고 한다.

"오클랜드에 원추리힐이라는 유명한 공원이 있습니다. 거기 수령이 몇백년씩 되는 아름들이 나무들이 많고 양들을 방목하여 키우는데 경치가 좋아 자주 가서 산책을 하였지요. 하루는 4-5세쯤 되는 아들아이랑 젊은 키위부부가 와서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놀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또래들과의 어울림 중에 무례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아이아빠는 벌떡 일어나 자기아이에게 다가가더니 그 조그만 아이의 멱살을 잡아 허공으로 들어올렸습니다. 정말 만화영화에서 큰 거인에게 잡힌 강아지모양 아이는 허공에서 바둥바둥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습니다. 아이아빠는 그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상태에서 또박또박 이야기하였고 공중에 멱살잡이하듯 들어올려져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는 아빠의 이야기를 수긍하며 잘못을 인정하고서야 땅에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는 당연하다는듯 아빠를 지원하였고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도 그 상황을 존중하는 듯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너무도 엄격한 자녀교육에 저두 놀랐고.. 저렇게 어려서 크게 잘못을 깨닫게 해주면 절대 안잊겠구나.. 싶었습니다." (사사세 회원인 NZ님의 글에서...)

반면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주변을 살핀 후 아이의 손을 이끌며 "사람들 눈에 띄면 혼나는데...' 정도로 그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어떤 사회적 현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었어 어떤 두려움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탈놀이문화를 봐도 그렇다. 우리 탈문화는 옳고 그름의 판단하는데 있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만들어진 놀이문화이다. 얼굴을 가려야만 신랄한 사회 비평과 풍자가 가능했던 어두운 시절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제도나 사회구성 원리로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각 개인의 가치관과 내면화되어야 할 도덕적 규범으로, 그리고 공공의 질서로 발전해야 한다. 이것은 시민주권운동의 실천과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노공께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하시고자 하는 시민운동의 한 방향이 아닐까...?

우리는 이곳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 비판은 대통령으로서의 성과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상당 부문은 그의 자질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서울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히딩크와 만나는 행사를 서울시가 주최한 적이 있엇다. 그 행사에서 그는 참석한 많은 시민들을 제쳐놓고 자신의 아들을 불러내어 히딩크에게 소개하고 사진을 찍게 하는 등 특별대우를 하였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여할 대우가 자신의 아들에게만은 예외였다. 특별대우를 한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사례였다. 그는 또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했다. 서울시는 사유물이 아님에도 자신의 가진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 한 일이었다. 자신의 소유도 아닌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신앙의 배반이다. 이것은 이명박씨가 민주주의자로서의 자질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아직 우리 국민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주권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이고...

우리는 지금 이러한 성숙하지 않은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너무나 흔히 목격해야 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 어떤 다툼으로 경찰서에 잡혀가면 경찰관은 누가 싸움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누가 나쁜 사람인가를 규명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누가 피해를 더 많이 입었는가를 따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레저레 억울한 사람만 생기고 온힘을 기울여 법을 왜곡하거나 회피할 수단만을 강구하게 만든다.

'사람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다툼이 생겼을 때,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보다는 양비론적 입장이 단연 우세를 보인다. 대충 덮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대충 덮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잘못된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엄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바로 이 양비론과 양시론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로 팽개치면 어떨까? 대충 뭉뚱거려 얼버무리는 것은 기득권 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해결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