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부질없는 지저귐 |
[최세진의 오도니안의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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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08일 (화) 17:40:01 | 최세진 /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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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자체 선거 결과를 두고 많은 이들이 ‘트위터의 열풍’을 언급하고 있다. 애초에 잘못된 여론조사를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던 청와대도 급기야 어제(7일) 오전 트위터 계정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트위터가 선거 반전의 원인이었을까? 그리고 계정을 만들면 트위터에서 청와대의 지지도가 급반전 할까?
새롭게 등장한 트위터(Twitter, 지저귀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기술이 사회를 바꾸었다는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기술결정론’적인 착각이며, 청와대가 계정을 만들어서 그 변화를 돌려보겠다는 생각은 트위터가 가진 소통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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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트위터 계정 |
트위터가 사회를 바꾼다는 주장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사회를 바꾼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생각을 ‘기술결정론’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데, 기술결정론이란 과학기술이 사회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하며, 그 기술이 사회의 변화를 규정한다는 이론이다. 기술결정론자들이 가장 많이 드는 예는 인쇄술인데, 이들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근대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앞서 발명되었던 통일신라시대의 인쇄술은 근대를 만들지 못 했으니, 인쇄술이라는 기술만으로는 근대의 자본주의가 성립하지 못 한다는 강력한 반증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엘빈 토플러는 정보통신기술로 무혈혁명이 일어나 계급 모순이 사라진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 찬양했다. 정보통신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이러한 막연한 기대감 역시 기술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근본적인 혁명이 없이도, 기술의 축복아래 모두가 풍요롭게 살 것이라는 이런 망상은 20세기 내내 수많은 싸구려 SF에서 반복되며 재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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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반대로 기술의 발전이 지옥을 낳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이다. <터미네이터 2>에서 주인공들은 CPU 칩 때문에 미래에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그 칩을 파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분한 T-800은 모든 싸움을 마치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칩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자살을 한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그 기술이 인간을 공격하리라는 생각은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도 이어진다. 영화 <쥬라기 공원>(1993) 역시 그러한 기술 혐오주의를 바탕으로 유전공학이 일으킬 가공할 공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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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포스터 | ||
이 두 가지 양극단의 기술결정론은,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기술의 발전이 유토피아이겠거니 믿고 가만히 기다리거나, 그 지옥을 막기 위해 기계파괴 운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쇄술이나 정보통신기술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은 현실을 잘못 해석한 오류투성이의 신념일 뿐이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의 주장에 맞서 나온 이론이 기술의 사회결정론이다. (사회결정론은 다시 사회형성론과 사회구성론으로 나뉜다.) 기술의 사회결정론자들은 기술이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소 등 다양한 현상들과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기술 자체의 힘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고 이용하는 사회 집단이며, 기술 역시 그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의 예를 들어 사회결정론을 설명하자면, 인터넷이라는 기술 그 자체가 민주사회나 통제사회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회가 가진 기존의 사회정치적 특성에 따라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개발되며, 인터넷의 특성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즉, 쉽게 말해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적인 사회에 인터넷이 도입되면 더욱 민주화를 촉진하겠지만, 독재적인 사회에 인터넷이 도입되면 더욱 더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회적 결정론은 왜 다른 OECD 국가와 달리 한국에만 ‘실명제’라는 게 존재하며, 인터넷 검열기술을 위한 법제도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지 잘 설명해준다. 한국의 현재 사회정치가 인터넷이라는 기술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시켜주고 있지만, 각국에서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사회결정론의 눈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보통신기술 뿐 아니라 어떤 기술도 기존의 사회정치적 틀을 벗어나서 형성될 수 없다. 기술 역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맑스의 언술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배 계급은 법과 제도, 무력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정보통신기술에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려 노력하고, 민중은 그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을 펼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간다. 이게 바로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둘러싸고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양상이다.
SF에서 정보통신기술 등 새로운 기술을 둘러싼 투쟁은 ‘사이버 펑크’라는 하부 장르에서 진행되고 있다. 윌리엄 깁슨은 소설 <뉴로맨서>(1984)에서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라는 개념과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며, 그 새로운 공간에서의 투쟁을 그려냈다. 윌리엄 깁슨과 더불어 사이버 펑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브루스 스털링은 좌파적 사이버 펑크 혁명 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사이버 펑크 소설은 극히 적은 편인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와 닐 스티븐슨의 <스노크래시>(1992), <다이아몬드 시대>(1996) 등이 번역되어 있다. 사이버 펑크의 전통을 따르는 영화로는,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블레이드 런너>(1982)와 <코드명 J>(1995) 등이 있으며, 필립 K. 딕이 던진 화두를 한층 발전시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 영화와 소설들은 현재의 사회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미래의 사회에서도 투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술은 그 자체로 천국을 약속해주지 않으며, 지옥을 만들지도 않는다. 기술을 둘러싼 민중들의 투쟁만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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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포스터 |
한국의 대중들이 트위터로 몰려갔던 것은,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에 취한 대중의 몽상이 아니라 실명제를 이용한 국가 검열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의 연장선이자, 그 결과였다. 그 관점만이 왜 대중들은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투데이’가 아니라 ‘트위터’로 몰려갔는지, 왜 미투데이 사용자들보다 트위터 사용자들이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훨씬 많이 주고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트위터 열풍이 선거 반전의 원인이 아니라, MB 정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트위터 열풍을 만들어낸 원인이었던 것이다.
자, 다시 한 번 묻자, 청와대의 트위터 계정은 과연 트위터에 불고 있는 반MB 열풍을 진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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