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노무현의 철학에는 일관성이 있다
ㆍ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운명이다>를 읽고
'노무현’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흐른다. 그분 인생에는 영광의 순간도 오욕의 순간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이 너무 아프다. 아니, 그분을 잃고 그리움에 애타는 우리 운명이 더 아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참모들이 봉하에 내려가면 당신이 직접 길을 내고 가꾼 동네 숲으로 우릴 안내했다. 도시에서 자라 꽃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참모들에게 새와 억새, 갈대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대중과 소통할 <진보의 미래> 계획
외래 품종인 리기다소나무가 우리 소나무를 위협한다며 직접 베어 길을 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다친다며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손수 톱과 낫을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하는 법이 없었다. 나무와 풀을 베느라 산책이 몇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마을 해설사 역할도 했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당신의 유머에 우리는 배꼽을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관광객을 만나면 어김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허리통증이 겸손한 90도 인사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분은 함께 사진 찍는 서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운명이다>에서 밝혔듯이 그분은 여전히 “꿈 많은 청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래된 참모 가운데에는 지친 사람도 있었다. 1980년대의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오랜 야당생활, 격무와 비난에 치었던 청와대 5년을 거친 뒤에도 에너지가 남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 참모들은 이제는 당신이 좀 편히 쉬셨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실패를 말하니까 수구언론이 좋아라고 이를 이용하는데 치졸한 말장난이다. 그분은 대통령으로서의 성과나 업적에 대해서는 누구와 논쟁해도 설득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실패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정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가 한 세대에 이루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판단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시민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시민이 진짜 권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시민사회의 발전 없이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사회가 강해야 진보 정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통령직 취임 후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법을 존중하는 민주 국가에서는 대통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보의 뿌리가 없는 나무 꼭대기에 앉은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일으키는 여론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신세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광복 후 지난 6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성장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대안적 삶의 비전과 전략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학자들의 고준담론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집단창작을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이었다.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은 눈빛이 형형한 청년학도의 얼굴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짧은 나는 다른 참모와 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미래 꿈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다. 그분이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오래된 동지보다는 우리처럼 공부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앞으로 나타날 ‘제2의 노무현’ 기대
노 전 대통령을 뺀 나의 남은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분과 함께 책을 쓰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는 꿈을 꾸었다. 당신은 늘 어린아이들과 청년의 미래를 걱정했다. 리더십센터를 만들어 청소년·대학생들과 함께 민주시민의 덕목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 했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항상 대통령에게 쓴소리만 하는 나쁜 참모였지만 퇴임 후에는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다. 앞으로는 그분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마음껏 댓글을 주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우리와 똑같이 실명 석 자를 걸고 토론했다.
<진보의 미래> 집필 준비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봉하에 내려갔다. 지난 해 초 진영읍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쳐갔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의 운명에서 그 일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두려운 마음으로 미뤄오던 <운명이다>를 읽었다. 그분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조각을 떼어내도 각 조각에는 어김없이 그분의 전체 모습이 들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분이다. 그분의 인생에 흐르는 철학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다. 원칙과 신뢰, 분권과 균형발전, 자율과 책임. 그 분의 사상과 철학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 진화하고 다듬어졌음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난 세월을 읽으며 그분과 인연이 오래된 동지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아플 것이라 생각하니 위안이 됐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 없이 너무 쉽게 최고의 민주주의를 맛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현실정치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희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이 있었기에 노 전 대통령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량은 거기까지였다. 퇴임 후 그분을 지켜 줄 힘은 없었다.
우리는 곧 제2의 노무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의로 가는 울퉁불퉁한 진흙탕 길을 말끔히 포장해 놓았다.
이제 우리 목표는 제2의 노무현이 퇴임 후에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희생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견고한 시민세력의 창출,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시민들에게 남겨진 운명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전 청와대 홍보수석>
'노무현’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흐른다. 그분 인생에는 영광의 순간도 오욕의 순간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이 너무 아프다. 아니, 그분을 잃고 그리움에 애타는 우리 운명이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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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청와대출입기자단과의 북악산 등반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오른쪽)이 나란히 걷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참모들이 봉하에 내려가면 당신이 직접 길을 내고 가꾼 동네 숲으로 우릴 안내했다. 도시에서 자라 꽃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참모들에게 새와 억새, 갈대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대중과 소통할 <진보의 미래> 계획
외래 품종인 리기다소나무가 우리 소나무를 위협한다며 직접 베어 길을 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다친다며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손수 톱과 낫을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하는 법이 없었다. 나무와 풀을 베느라 산책이 몇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마을 해설사 역할도 했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당신의 유머에 우리는 배꼽을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관광객을 만나면 어김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허리통증이 겸손한 90도 인사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분은 함께 사진 찍는 서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운명이다>에서 밝혔듯이 그분은 여전히 “꿈 많은 청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래된 참모 가운데에는 지친 사람도 있었다. 1980년대의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오랜 야당생활, 격무와 비난에 치었던 청와대 5년을 거친 뒤에도 에너지가 남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 참모들은 이제는 당신이 좀 편히 쉬셨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실패를 말하니까 수구언론이 좋아라고 이를 이용하는데 치졸한 말장난이다. 그분은 대통령으로서의 성과나 업적에 대해서는 누구와 논쟁해도 설득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실패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정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가 한 세대에 이루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판단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시민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시민이 진짜 권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시민사회의 발전 없이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사회가 강해야 진보 정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통령직 취임 후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법을 존중하는 민주 국가에서는 대통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보의 뿌리가 없는 나무 꼭대기에 앉은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일으키는 여론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신세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광복 후 지난 6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성장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대안적 삶의 비전과 전략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학자들의 고준담론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집단창작을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이었다.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은 눈빛이 형형한 청년학도의 얼굴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짧은 나는 다른 참모와 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미래 꿈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다. 그분이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오래된 동지보다는 우리처럼 공부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앞으로 나타날 ‘제2의 노무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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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 |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항상 대통령에게 쓴소리만 하는 나쁜 참모였지만 퇴임 후에는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다. 앞으로는 그분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마음껏 댓글을 주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우리와 똑같이 실명 석 자를 걸고 토론했다.
<진보의 미래> 집필 준비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봉하에 내려갔다. 지난 해 초 진영읍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쳐갔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의 운명에서 그 일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두려운 마음으로 미뤄오던 <운명이다>를 읽었다. 그분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조각을 떼어내도 각 조각에는 어김없이 그분의 전체 모습이 들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분이다. 그분의 인생에 흐르는 철학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다. 원칙과 신뢰, 분권과 균형발전, 자율과 책임. 그 분의 사상과 철학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 진화하고 다듬어졌음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난 세월을 읽으며 그분과 인연이 오래된 동지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아플 것이라 생각하니 위안이 됐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 없이 너무 쉽게 최고의 민주주의를 맛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현실정치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희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이 있었기에 노 전 대통령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량은 거기까지였다. 퇴임 후 그분을 지켜 줄 힘은 없었다.
우리는 곧 제2의 노무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의로 가는 울퉁불퉁한 진흙탕 길을 말끔히 포장해 놓았다.
이제 우리 목표는 제2의 노무현이 퇴임 후에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희생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견고한 시민세력의 창출,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시민들에게 남겨진 운명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전 청와대 홍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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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5191527521&code=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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