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민주주의

참된 관용은 무엇인가?

똘돌이 2009. 4. 1. 09:48

id: 김동렬김동렬

진정한 관용은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글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 ‘관용은 용서와 다릅니다.’ 등에 언급된 ‘관용’에 주목하자. 왜 갑자기 관용을 말씀하실까? 표면이 있으면 이면이 있는 법. 보이지 않는 저쪽에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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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용서가 아니다. 프랑스인의 tolerance가 그러하다. 어원을 찾아보면 ‘무거운 것을 들고 견딘다(tolerate).’ ‘(상대편의 배려없는 방자함을) 견디며 허용하다’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무거운 것이 들려있다(tolerate). 곧 ‘짐이 지워져 있다’는 뜻이다. 두 어깨에 지구를 짊어진 그리스신화의 거신 아틀라스(Atlas)를 떠올릴 수 있다. 아틀라스의 어원이 똘레랑스와 같다.

관용을 정치 슬로건으로 써먹은 이는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왜 관용을 주장했을까? 로마는 게르만을 정복했지만 게르만족 일부가 로마시민권을 얻어 로마로 진출함은 물론 심지어는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로마시민이 게르만족을 포용하는 것이다. 목욕을 안 해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르바로이들이(로마에 800개의 목욕탕이 있었을 정도로 로마인은 청결했다.) 깍지않은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서 ‘나 게르만 족장으로 이번에 원로원의원으로 뽑혔는데 원로원 가는 길은 어디요?’ 하고 길을 묻는 꼴불견이라니. 그런 못볼 꼴을 보고 견디는 것이 똘레랑스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카이사르는 원래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의 국가 개념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는 개별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정신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뜻하게 되었다.

로마시민권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는 ‘국민’ 개념은 ‘세금 내고 대신 국가의 보호를 받는 자’를 의미한다.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로마시민권 개념은 ‘주주가 주식지분을 가지고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듯이, 게르만 족장이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참여함’을 뜻한다. 의미가 다르다. 그 의미가 넓혀진 시민권 개념에 의해 로마는 국가 단위를 넘어선 초국가적 패권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 이전에 알렉산더가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동서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마케도니아 족장 출신으로 그리스를 관통하고 페르시아를 넘어 이집트와 인도를 아울렀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를 품었지만 산악국가 그리스의 폐쇄성을 극복했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렇다. 국가 단위의 좁은 관념에 붙잡혀있는 사람이 관용을 이해함은 불능이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의 눈높이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홍세화가 소개하는 오늘날 프랑스인의 관용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다.

프랑스인의 관용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알제리인이나, 수업시간 교실에서도 히잡을 고집하는 아랍인, 혹은 터키인이나 유태인 등을 두루 포용하자는 것이다. 그 이면에 철저한 프랑스 중심주의, 드골식 대국주의, 백인-기독교문화권의 우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인들에게도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관용의 사상이 있다. 그 바탕에 철저한 중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가짜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의 지평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작은 국민을 졸업하고 너른 시민의 바다로 입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극적으로 세금내고 보호받을 궁리를 넘어,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지구촌 인류운명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적극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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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현대성’의 개념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현대성의 본질은 문명의 확대, 전파, 그리고 진보에 있다. 그것은 좌파들의 사회주의와 다른 개념이다.

진정한 진보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인류문명의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현대성’은 21세기에 느닷없이 요청된 사상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탄생기, 성장기, 청년기, 장년기, 완숙기로 전개되는 사이클에 따라 여러 형태의 현대성이 존재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쓰며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낡은 봉건잔재라니-우상의 시대를 끝막고 이성의 시대를 주장했을 때 이미 현대성의 개념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부활 혹은 재생을 의미했지만 실제로는 흘러간 그리스 구문명의 재발견이 아니라 밝아오는 근대의 여명기에 그 신문명의 힘찬 도전이었다. 그래서 현대성이다.

물론 필자가 말하려는 현대성 개념의 요지는 ‘21세기 문명의 해석' 임무다. 우리에게 21세기란 무엇인가? 21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8세기의 계몽, 19세기의 산업, 20세기의 혁명, 그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다.

고대가 문명의 탄생기, 봉건이 문명의 성장기, 근대가 문명의 청년기라면 21세기는 문명의 장년기 혹은 완숙기가 되겠다. 이 시대가 문명의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라면 그 수준에 걸맞는 삶의 양식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이상주의라는 종착지를 가진다. 문명 단위로 사고한다 함은 이상주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르네상스 정신이 그렇듯이, 근원의 이상주의로 돌아갈때 한하여 국가단위를 넘어 문명단위로 사고하게 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었는가? 예수의 유토피아는 천국이다. 석가의 유토피아는 극락이거나 혹은 열반이다. 공자의 유토피아는 요순시절의 이상향이다. 노자의 유토피아가 무위자연이라면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 개념이다.

어느 줄에 가서 서든 그것은 남들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는 짓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유토피아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재앙은 시작된다. 타인의 유토피아를 허용하는 것이 관용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똘레랑스는 카이사르의 용서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허용이 아니라 수평적 ‘공존’을 의미한다. 공존이 관용이다. 그것은 타인의 이상주의가 나의 이상주의와 조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이상주의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21세기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 방법으로 변방에서 불명한 우리의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어 기세좋게 중앙으로 치고나가 태풍처럼 몰아쳐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프랑스인의 관용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태도에 불과하다. 진정한 관용은 문명의 지평을 열어가는 리더가 문화지체의 지진아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참된 그것은 21세기를 해석하여 그에 걸맞는 문명을 디자인하고, 코디하고, 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다양한 이상주의를 제 위치에서 제각기 완성시키고 선후와 좌우와 강약에 따라 짝을 지어주고 제 자리를 찾아주며 알맞게 배치하는데서 온갖 새로운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며.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일을 풀어가는 것이다. 주어진 온갖 방법들 중에서 순간순간 판단하고 선택하여 각자에게 걸맞는 역할을 주고, 맞는 제 짝을 찾아주고, 적당한 포지션을 잡아주고, 임무를 주고 또 서로 충돌하거나 어긋나지 않게 조율함으로써 최고의 역동성과 최선의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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