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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ndong.net/news-2007/view.asp?s=5&seq=4973
기사 내용
이 풍진 세상 - 온달과 노무현, 그 '경멸과 증오'의 방정식 | ||||||||||||||||||||||||
온달산성에서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생각한다 | ||||||||||||||||||||||||
"오늘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 산성에서 엽서를 띄웁니다." 이 문장은 쇠귀 신영복 선생의 글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갑니다"(나무야 나무야, 2001)의 첫 문장이다. 내가 가족과 함께 단양의 온달산성을 다녀온 것은 지난해 이맘때, 대통령 선거일이었지만, 오늘은 같은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온달산성이 있는 충북 영춘은 내가 사는 데서 100여 Km쯤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다. 이 조그마한 시골 언저리에 길게 누운 427m의 성산(城山)에 세워진 길이 92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이 온달산성이다. 중3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이 글을 내리 세 해 동안 가르쳤지만 정작 나는 거기 가 보지 못했었다. 문학작품 속의 배경을 굳이 찾아 볼 까닭은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온달산성에 가 보고 싶었다. 대통령 선거일에 길을 떠난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오전 10시께 우리 가족은 인근의 투표소에서 투표를 끝냈다. 날씨는 쾌청했고, 짧은 겨울해지만 시간은 넉넉했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렵니다.
쇠귀 선생은 이 산성에서 띄우는 엽서를 통해 당신이 산 중턱의 정자 사모정(思慕亭)에서 나머지 길을 '평강공주'와 함께 올랐다고 말한다. 그는 평강공주와 온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사랑의 이야기를 믿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함께 만들어 전해 온' 이 이야기가 '어떠한 실증적 사실(史實)보다도 당시의 정서를 더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시골에서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평민 청년이 지엄한 신분의 왕녀와 혼인한다는 이 이야기는 구태의연한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설화의 화소(話素)는 <무왕설화>와 비슷하다. 그리고 갈등구조의 유형으로 보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과 유사하다. 이 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 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을 보여준다. 그것이 여성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설화문학이 갖는 민중적 역사의식은 만만하지 않다. 엄격한 신분제가 기능했던 고대국가에서 평민과 왕족의 혼인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바보'로 조롱되던 미천한 시골 청년과 공주의 혼인이란 '언감생심'의 문제였다. 쇠귀 선생은 이 전설의 사랑 이야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에 숨어 있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는,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과정에서 부유해진 평민 계층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사회 변동기였다는 사료(史料)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보 온달'이라는 별명도 사실은 온달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분석되기도 합니다. 나는 선생의 글에서 유독 "'바보 온달’이라는 별명도 사실은 온달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분석"된다는 데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노모 봉양을 위해 걸식하던 우스꽝스러운 용모의 청년을 가리킨 '바보'가 '지배계급의 경멸과 경계심'의 다른 이름이라고? 신영복 "'바보 온달',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낸 이름"
'바보 노무현'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지지자들의 열광적 경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 이름의 함의는 물론 우직하게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해 가는, 정치인답지 않은 정치인 노무현에게 바치는 경의와 찬사다. 그러나 변화를 희구한 대중의 지지로 집권한 뒤, 그가 보인 정치적 선택과 행보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적지 않았다.
그리고 5년, 지배그룹의 대표 선수 격인 이회창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대선에 출마했고, 상대는 잽 거리도 안 되는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뚝심으로 지역감정에 도전해 당락과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 첫 정치인이었다. 수차례의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다. 그것은 지지자들이 바치는 '경의와 사랑', 그 반어적 수사였다. 노무현의 존재감은 김대중과 비기기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질시와 정몽준의 연대 파기 등의 우여곡절을 겪고도 그는 보란 듯이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건 그 자신의 신념에 대한 지지자들의 헌신, 변화에 목말랐던 대중의 정치적 요구의 결과였다. 노무현의 당선은 연거푸 고졸 출신의 정치인이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지배 엘리트 계급의 이회창을 꺾은 파란의 사건이었다. 김대중의 경우는 수십 년 동안의 정치활동을 통해 쌓은 경륜과 카리스마가 그의 학력을 상쇄해 주었지만, 노무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품위 때문에 말을 아꼈을 뿐,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지 않았을까. 부산 촌놈이 청와대에 들어앉았다고? 서울대는커녕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천민'이? 그들이 과연 노무현을 국가수반이나 지배 권력으로 여기고 대우했을까?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자기 계급(층)과 그 기득권과 이해에 기반한 배제의 논리는 핏줄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다. 정치적 반대나 불신이 증오나 적대로 전이되거나 동일시될 수 있는 이 땅의 묘한 정치문화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를 자연스럽게 키워 갔던 듯하다. 결국 '국민 스포츠'라는 '노무현 씹기'는 앞서 지적한 대로 "보수언론과 정당의 노무현 증오가 초래한 정치공세가 전체 사회의 집합가치"가 되는 데 일조했다. 노무현 증오의 본질 '느닷없이 빼앗긴 지배권력' 보수언론과 야당의 노무현 증오의 본질은 '느닷없이 빼앗긴 지배권력'이나 승복할 수 없는 '권력 교체'에 있다. 이 증오의 흐름에는 결코 승복하고 싶지 않았던 전임 '김대중 정부에 대한 증오'까지 덤으로 얹혔다. 거기다 근거 없는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영남사람들과 노무현의 기대를 접은 지지자들까지 합류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노무현에 대한 기득권의 증오와 '온달에 대한 지배계급의 경멸과 경계심'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6세기께 고구려의 지배계급은 중앙 정계로 진출한, 쫓겨난 왕녀가 달고 온 사내, 온달을 '바보'라는 이름으로 능멸하고 빈정대는 데 그쳤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반열로 달려든 낯선 사내가 불편하고 고까웠을 뿐이었으리라.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을 온달에 비길 순 없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을 가당찮은 촌놈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지난 김대중 정부에 이어서 연거푸 말이다. 그들의 인내심의 한계는 자신들 권력의 들러리로나 기능해 온 주변부 권력에 지나지 않았던 김대중 정부까지였다. 그들의 경멸은 빼앗긴 권력 때문에 증오로 전이되었고, 그것은 노무현 집권 내내 권력과 그 주변을 물어뜯어대는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발현되었다. 모든 것을 '반노무현'이라는 가치와 방향으로 수렴하면서 그들은 내내 우경화의 길을 걸었던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절대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 통치자는 노무현이었지만 그들의 의식 세계에서 노무현은 배제된 권력에 불과했다. 형식상 그들은 야당이었고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지만, 권력과 통치에 대한 일관된 거부와 저항을 통해 자신들 지배 그룹의 기득권과 이해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쇠귀 선생은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로 우리 사회를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 그들은 권력을 잠시 내어주고 있었지만, 언론과 자본·법조·사회문화적 토대를 한 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경멸과 폄훼를 통해 자신들의 동질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그들만의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를 공고히 지켜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대선에서 '가소로운 좌파'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것이다.
영속적 지배를 꿈꾸는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에 균열을 낸 노무현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실패했는가. 그의 정부는 대중의 지지와는 어긋난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통치는 보수 지배세력의 추인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좌파'로 매도당하면서 '정치적 증오의 일상화'만 불렀을 뿐이다. 거기 답해야 하는 다수 대중은 지금 침묵하고 있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고단한 삶에 지쳐 발언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혹은 비주류에 대한 기득권과 주류의 경멸과 증오가 그들의 지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현재까지 드러난 저들이 그리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이들 대중의 바람과는 너무 멀어 보이는 까닭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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