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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똘돌이 2008. 11. 11. 10:32

(펌) 민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

민족주의.

지난 백여년간 이만큼 우리의 역사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이데올로기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한말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의 각축이 시작된 그 시절부터 합일합방을 거쳐 일제시대는 물론 최근의 용천 열차사고 지원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의 정치 이념 및 종교를 뛰어넘는 보다 근원적인 가치로서 우리들 속에서 존재해 왔다.

특히 60 년 가까이 분단 상태로 있는 남북 문제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항상 복잡미묘한 국내외 정세와 다양한 집단의 주장 및 이익을 중재, 초월하는 상위 개념으로 그 상징적이고도 숭고한 의미를-현실에서 적용되었는지는 별 문제- 유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80 년대부터 일반에게 퍼져 나간,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한 다양한 운동들은 가난과 전쟁, 독재, 직/간접적 식민 지배에 찌들어 왔던 우리의 긍지와 자존심을 되찾고 보다 밝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내는 정신적인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다. 퇴계, 율곡 등의 독창적인 유학 사상, 동학, 세종의 한글 창제, 광개토대왕의 대 고구려 건설이나 이순신의 신출귀몰한 용병술 등은 우리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는 우리 역사의 자랑거리다.

그리고 이런 정사에 속하는 이야기들뿐 아니라, '환단고기' 같은 아주 옛날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자료를 통해 과거 중국은 물론 아마도 인도 북부와 현재의 중앙 아시아 지역까지도 진출했을지 모를 수천년 전 우리 선조들의 영광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반도 구석에 자리잡은 힘없는 변방 민족이 아닌, 한 때 아시아를 제패했던 위대한 제국의 후예로서 이를 다시 한 번 빛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띈 존재로 승화된다. 참으로 가슴 뜨거운 이야기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초고대에서 근대에 걸친 우리 역사의 전반에 개입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심점과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자양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흔들림 없는 단일민족 개념부터 시작해서 중국이나 일본과의 스포츠 경기에서 보여주는 강력한 라이벌 의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책의 대 히트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가 완전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 자, 그럼 이제 국장은 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민족주의, 혹은 민족 그 자체에 대해 좀 더 깊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논의를 시작하자 한다. 미리 말해 두건데, 국장이 지금부터 다루는 이야기는 특정 성향의 분들에게는 아주 예민한 문제로 다가갈 수 있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도 다분하다.

문장마다 일일이 다 토를 달고 변명할 수는 없는 만큼 그저 두 가지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국장이 이런 예민한 글을 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국장이 이를 통해 추구하고 싶은 비젼은 과연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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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21 세기 현대의 관점에서 전통적 민족주의는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문제의 갈래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민족주의의 바탕이 되는 역사관의 실재성 측면, 둘째는 민족주의가 야기하는 심리적인 부작용 부분이다.

첫번째는 결국 민족주의를 서포트하는 각종 개념의 객관적인 정당성 부분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울나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되고 당연시되는 개념인 '5 천년 단일 민족' 부분부터 생각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국장은 과거 몇차례 글 속에서 짧게나마 단일 민족 개념이 완전한 허구라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바로 이 부분부터 본격적으로 조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민족' 을 백과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공유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되는 집단. 이 경우의 문화란 언어·종교·세계관·사회조직·경제생활 및 그 밖의 생활양식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뜻을 지닌다.

한편 국어사전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나 풍습 따위 문화 내용을 함께하는 인간 집단. 겨레.

두 정의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망정 기본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혹시 이 정의들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는가. 과연 이 정의가 울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민족' 에 대한 인식과 전면 부합되는가 말이다. 아니다. 왜냐 하면, 울나라에 있어서 민족 개념에는 언제나 혈연, 즉 '단군의 자손' 으로 대변되는 소위 '블러드 라인' 의 공유가 기본이자 절대적인 키 포인트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정의들에는 혈연에 대한 암시는 있을 망정 구체적인 적시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단군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유태인들의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다. 단일 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마치 그의 피를 물려받은 하나의 거대한 순수 혈연집단과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강조하여 우리의 사고속에서 현재 작동되고 있는 한국식 '민족' 의 정의를 만들어 적어보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민족: 같은 조상의 후손으로서 같은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함으로서 언어, 문화, 외모, 풍습 등을 함께 하는 거시 규모의 혈연 집단.

... 바로 이것이 울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민족이며, 따라서 우리의 민족주의 역시 사실상 이런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울나라에서 '단군의 자손' 개념을 뺀 민족 개념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따라서 '5 천년 단일 민족' 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군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나오는 그 블러드 라인을 상정하는 것이며,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라인의 맨 끝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장은 여기서 단군의 실존 여부를 따지고 들려는 것이 아니다. 단군은 개인으로 실존했을 수도 있고(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 왕검) 고조선의 왕을 칭하는 '직책' 의 이름일 수도 있으며 아예 신화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포인트는, 설사 이 단군이 개인으로 실존했다 한들 그를 피라미드의 맨 꼭지점으로 두는 거대한 혈연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국장만 해도 당나라말에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다. 머 이미 천년쯤 된 이야기니까 이를 바탕으로 국장이 '중국인' 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최소한 천년전 이전의 국장의 직계 조상들은 단군의 자손이 아닌 중국 한족임이 거의 분명하다. 이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소리다.

물론 이후 이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수백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는 국장의 가문에서 당나라 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옅어졌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국장의 집안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집안들이 이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이들의 혈연 관계 속에서 피는 끊임없이 뒤섞인다는 사실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당나라 피 외에 이후 천년간 송, 금, 원, 명, 청, 일본 등 주변국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생각해보자. 특히 고려시대에 있었던 거란과 몽고의 침략-거의 전 국토를 정복했었던-이나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국장의 피 속에는 아마도 그간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혈연집단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유전인자가 모두 뒤엉켜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비단 국장 뿐 아니라 열분들 '모두' 에 해당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있어서 단군은 더 이상 피라밋의 정점에 위엄있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기 그지 없는 방대한 그물망 속 어딘가에 보일락 말락 하게 위치하는 수준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은 존재하나 그 경계선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모호한 것이다. 특히 혈연적 순수성에 집착하는 단일민족, 그것도 수천년간이나 이어져 온 경우라면 이는 울나라 뿐 아니라 현실세계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그저 우리의 바램과 필요가 빚어내는 순수한 환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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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런 관점 하에서라면 <환단고기>로 상징되는 울나라 상고사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혈연 관계 역시 매우 약해지고 만다. 이 책의 진위 여부는 발견 이후로 항상 문제가 되어 왔고 이를 밝혀 내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혈연에 근본을 둔 우리의 민족주의는 설사 환단고기의 모든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별로 영향 받지 못한다. 왜냐.

환단고기적 상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벤트 중의 하나인 동이족(한민족) '치우' 와 한족 '황제' (그 역시 동이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간의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특히 황제가 치우를 죽임으로서 '난을 평정' 했다고 주장하는 탁록 전투는 그 경과나 결과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한나라때 그려진 치우의 그림. 마치
괴물과 같은 외모로 묘사되지만 한편 군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한고조 유방이
출전하면서 치우와 황제에 바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이 사건은 BC 2700 년 전후에 일어났다고 이야기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700 년 전의 아주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실존 여부도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으나, 무엇보다도 지금의 논의와 관련되어 중요한 부분은 그 경과나 결과가 어찌되었다 한들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왜냐 하면 그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아마도 우리의 혈연적 조상들은 양쪽 진영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동이족 치우의 직계 후손으로서 그 혈연적 배타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특히 4700 년이라는 시간 스케일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1 세대를 30 년으로 봤을 때 4700 년은 근 160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대충 말해 160 번의 결혼이 행해졌을 것이고, 그렇게 각기 다른 과거의 혈연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결합한 결과가 바로 치우와 황제 이후 여기 우리까지 오게 된 경로인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 우리가 이 한반도 땅에서 태어나 살게 된 것은 민족적 숙명이라기보다는 온갖 크고 작은 역사속의 이벤트들이 결합된 과정에서의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환단고기나 기타 관련된 부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열정은 존중할 만 하나, 그분들 일부가 감정적인 열정에 치우쳐 길고 긴 고대사를 단순하고도 모호하기 그지 없는 혈연적 민족 관점을 통해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런 열정은 때로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를 몰고 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즉 수메르의 12 문명과 관련된 부분이 환단고기에 나와 있다는-파나류 12 국, 수밀이국 등- 것을 이유로 한민족이 당시 중앙 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일부의 주장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오류는 우리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수십년 단위의 짧은 시간 단위를 수백, 수천년의 역사적 시간대에 적용하는 경우에 흔히 발생한다.

앞서 말한, 5 천년 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그 사람들과 지금 우리가 얼마나 직접적 혈연 관계를 맺고 있을 수 있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수밀이국이 환단고기에 등장하고 그것이 진정 수메르를 뜻한다면 이것이 확실히 말해주는 바는 하나 뿐이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의 역사가 어떤 경로로든 간에 환단고기가 기록된 당시, 이를 기록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전해졌다는 것이다. 혈연으로 연결된 배타적 민족 개념 같은 것이 굳이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편 우리가 시조로 모시는 단군에 대한 기억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고르, 팅고르 등 여러가지 유사한 이름으로 동북 아시아 전체에 공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진, 말갈, 거란, 선비, 흉노, 돌궐 등 중국에 의해 소위 '오랑캐' 라고 불리웠던 동북 계통 민족 집단의 대부분이 단군 신화를 거의 유사한 형태로 공유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한때 이들 모두와 그 땅을 지배했다는 식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역사적 합리성을 완전히 결여한 어불성설이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이들 민족이 느슨하나마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고, 따라서 공통의 신화-혹은 사실의 기억-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점 뿐이다. 이는 다시 말해, 단군이 실재했다면 그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의 할아버지가 아니고, 따라서 우리들 자신만의 민족주의 속에 가둬 놓기에는 훨씬 더 크고 넓은 개념이라는 뜻이 된다.

다만 우리와 그들(여진, 말갈...)의 차이라면 사회/정치적 부침이 심하고 유목민적 성향을 가졌던 그들에 비해 우리는 나름대로 특정 지역에서 농경을 기반으로 정착해 불교, 유교 등의 메인스트림 종교 철학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문명국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는 점, 그리고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민족적 자긍심의 고취라는 지상 명제로 인해 다소 모호하게 전해져 오던 고대사 개념들을 보다 조직화, 일반화해서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민간 신화' 이던 것을 '문화' 로 재창조하는 것은 이를 주도하는 구체적인
학술 주체가 사회 속에서 역할하지 않으면 안되고, 울나라를 제외한 다른 동북아 민족들은 근대에 그런 기회를 맞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단군이 한민족만의 배타적 조상으로 우리 머리 속에 굳어지게 된 계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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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착각은
-선의의 착각이지만- 비단 치우와 단군 등의 상고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속에서 훨씬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 또한 이 복잡한 문제에서 매우 예민한 영역에 위치해 있다.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은 삼국 통일이 당나라의 힘(외세)을 업지 않고 신라의 독자적인 힘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의문을 던지곤 한다. 혹은 동북아의 대국이었던 고구려에 의해 통일되었다면... 하고 아쉬워 한다. 그 경우 한반도에 거대한 통일 왕조가 생겨나고, 그 결과 중원을 노려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후 우리 한민족의 운명과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실, 이런 생각은 단재 신채호에서 함석헌으로 이어지는 근현대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한 축을 이루었고, 특히 80 년대에 들어 대학생과 재야 사학계를 필두로 상당히 대중적으로 퍼져 나갔다. 역사를 남의 시각이 아닌 우리의 주체적 관점으로 다루는, 야심차고도 원대한 이런 시각은 그 자체로서 매력적이고, 독재와 분단에 신음하는 우리들에게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일제 지배와 전쟁, 가난, 독재 등 각종 고난 속에서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한 민족주의적 계몽운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에 함석헌 선생의 민족주의와 소박한 양심은 어려운 시대를 버텨가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과 힘이 되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21 세기에 들어선 현재에 있어서는, 그의 순박한 민족사관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판받을 구석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앞으로 펼쳐나가야 할 미래는 민족주의를 통한 자긍심의 고취보다 한 발짝 더 나간, 열린 세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생각의 면면을 좀 더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일단 삼국시대 자체의 정황을 현재의 관점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신라가 '외세' 를 끌어들여 비겁하게 자기 민족을 친 것일까. 아니, 더 나아가 그 당시에 '삼국 통일' 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기나 했을까.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현대적 의미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사실 근세 이후에 정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지금처럼 구체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삼국시대 신라인들이 언어와 문화가 사뭇 달랐던 고구려인들을 동포로 여겼을 거라는 주장은 고대에 대한 현대적 민족 관점의 적용일 뿐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정황을 보건데 오히려 고구려인들에게는 만주나 요동 지역을 배경으로 살아가던 여진 말갈 등의 종족이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편,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백제와 일본간의 밀접한 관계 또한 많이 밝혀져 있다. 특히 전쟁 막판에 일본의 함대가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백제를 구하기 위해 원정을 왔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 역시 '동포' 로서의 고구려나 신라보다 일본과 당시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 당시 신라에게 있어서는 백제나 고구려나 일본이나 당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을 수도 있고 전쟁을 할 수도 있는, 동등한 의미에서의 '타국' 이었을 거라는 점이다. 같은 민족에 의한 통일국가의 건설이라는, 후대에 의해 치장된 순수한 민족주의적 이념은 당시 김유신이나 김춘추에게는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전쟁을 수행하던 관련국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국익 수호와 영토 확장의 일반 법칙에 의해 서로간에 돕거나 싸웠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외세를 끌어들였다' 같은 관점은 적용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럼 이런 부분을 머리속에 남겨둔채 다시 생각해보자. 신라던 고구려던, 당시의 반쪽자리 삼국통일이 아닌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모두 포함하는 '한민족' 의 대국을 건설했다면, 그래서 이후 몽고(), 거란(), 만주족(금, 청) 등처럼 중원을 함락하고 그곳에 우리 민족의 국가를 건설했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동아시아의 맹주로 행세하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방금 국장이 열거한, 한때 중원을 차지했던 민족들이 현재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몽고를 제외하고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중원을 호령했던 이들은 지금 거대한 중국 속의 소수민족의 하나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만약 천년전에 이 한반도를 버리고 그런식으로 중원에 진출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 땅은 중국의 한 지역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우리 역시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채 변방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땅과 그 중심 문화가 가지고 있는 용광로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역사는, 중국을 차지하는 자는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들과 동화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좀 다른 각도로 생각해야 하는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 라는 관점을 버리고 순수하게 '고구려의 후손' 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은 실제로 중국에 진출해 결국 중원을 차지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 북부와 함께 지금의 만주, 요동 일부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그러나 삼국 통일을 통해 통일 신라에 편입된 곳은 이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머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통일된 '민족 국가' 에서 살기 위해 신라로 이주해 오지 않은 이상, 우리가 우리의 동족이자 조상으로 여기는 고구려인들의 대부분은 그 지역에 남아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바로 이후 이 지역을 기반으로 건국된 발해의 국민 대부분이었던 말갈족과 이후 금, 청 등을 건설한 만주족 등과 사실상 거의 공통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노래 제목이기도 한 '발해를 꿈꾸며' 같은 시각은 매우 혼란스럽고도 비합리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과연 '우리 민족' 의 국가인가? 발해의 지도층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말갈족들은 어떤가. 발해의 영토가 결코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거기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그들 역시 고구려인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 유민' 인 발해 지도층과 말갈족의 '민족적' 차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고구려의 영광-주로 중국을 상대로 한 정치적, 군사적인 경쟁력을 의미하는-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는 커녕 그 지역에 살던 고구려 유민과 후손들에 의해 발해를 통해 얼마 안가 다시 재현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금나라와 청나라라는 대제국으로 발전해서 실제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단지 실현되지 않은 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이후에 세운 국가, 즉 고려와 조선에 의한 고구려의 재현일 뿐인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그 뒤를 이은 고려와 조선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그것도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결여하는 신라와 백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왕조들인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한반도에 기초한 이들 왕조의 의무가 아니라 고구려 왕조가 소멸하면서 그 땅에 남겨진 그 사람들의 몫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는 여기 한반도에 터를 잡고 그 이후 천년간 살아온 우리만이 배타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그 지역에 살았던 그 사람들, 즉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 관계인 여진, 거란, 몽고인들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수십배 능가하는 거대한 성취를 실제로 현실에서 실현해 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몽고는 중원 뿐 아니라 동유럽에까지 진출했고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금은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내고 실제로 대국으로 존재했으며, 청은 최근까지 중국 전체를 지배하던 전제 왕조였지 않은가 말이다. (참고로 최근 중국인들이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속해 있는 만주족 등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고-이는 일정부분 분명 사실이다- 그들의 과거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장의 주장이 얼핏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국장은 결코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를 제외하면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한족의 중국과 그 주변 종족들과의 끊없는 협력 및 갈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는 현대에서 고구려까지 소급해 들어가 중국 역사에 일반에 일괄적으로 포함될 수는 없는 개별성을 갖기 때문이다.)

전성기 몽고 제국의 영역. 녹색선이 최대 영토, 붉은 색은 칭기즈칸의 정복로이다. 만주, 중원, 러시아, 동유럽을 망라하는 그 엄청난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몽고인들은 유전적으로 우리와 아주 가까우며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인과달리 외모상 거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다만 그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에게는 그런 빛나는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서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또 바깥 세상에 알리는 주체가 될 국가 혹은 이를 담당할 문화적 역량이 부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누려야 마땅할 역사적 영광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혹은 믿고자 하는 역사 속에는 이런 함정들이 숱하게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속에서 피해자로, 가해자로 오락가락하며 때로는 왜곡된 역사를 되찾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 원하는 모습만을 보고 믿기 위해 좌충우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속에서 마냥 희미해져가는 진실은 어쩌면 인류 전체의 반성과 진보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