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거짓말 그리고 대재앙 | ||||||||||||||||||||||||||||||
개방할수록 경제가 발전한다? 첨단기술 덕에 세계화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세계화로 국경과 거리가 사라지고 여러 나라의 경제 제도가 통일된다? 세계화의 ‘사실과 진실’을 밝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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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정부든 기업이든 학교든 살아남고 싶으면 어서 문을 열라는 말을 들어왔다. 조급한 마음에 영어를 많이 섞어 쓰고 외국인을 모셔다가 자리 채우는 것만으로 세계화를 잘한다고 떠벌리는 소동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책도 넘쳐난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 프랜시스 케언크로스의 <거리의 소멸ⓝ디지털 혁명>, 다니엘 예르긴의 <시장 대 국가> 같은 책은 세계 곳곳의 사례를 들어가며 세계화 담론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책을 필독 교양서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실은 세계화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퍼뜨리는 위험한 책들이다. 예를 들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따르면, 정부는 이제 정치를 접고 경제만 생각하며 세계화가 시키는 대로 이른바 ‘황금 구속복’을 입어야 한다는데,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의 게마와트 교수 표현을 빌리면, 그런 말을 믿고 정부정책으로 삼는 것은 ‘쓸데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세계화는 호들갑을 떨며 서둘러 할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봐야 한다. 세계화를 위해 국내 문제를 선뜻 희생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내 문제를 보면서 세계화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 때문에 이런 말 꺼내기가 조금 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새삼 나온 말은 아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세계화 이야기는 원래 제대로 된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잘못된 속설이 너무나 많다. 세계화 수준, 100년 전과 비슷 세계화 속설에 따르자면, 통신·컴퓨터와 운송 수단 등 첨단 기술이 발달해 지구는 이제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 되지 않는 ‘작은 동네’가 되었으니, 세계화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상당수 주류 경제학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첨단 기술은 세계화 본질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세계화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전화나 인터넷조차 그렇다. 1930년 뉴욕에서 런던으로 3분간 통화하는 데 350달러였다는데, 요즘 인터넷 전화의 경우는 세계 어디든 공짜에 가깝다.
개방과 세계화는 기술보다는 정책에 따라 달라져 왔다. 많은 나라에서 1960년대부터 무역자유화를, 그리고 1990년대부터 자본자유화를 정책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과 인도,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가 시장경제에 새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보다 정책이 세계화를 가져왔기에 그 세계화는 잘못될 수도, 멈출 수도, 거꾸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인다.
세계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또 다른 유명한 예를 보자.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보내면 지구 반대편 인도에서 받아 곧바로 처리해 돌려준다. 전에 없던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인도와 미국이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떠넘길 수 있는 일은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인도 같은 저개발국에서 그런 일을 맡아줄 만큼 교육 수준이 높고 영어가 통하는 노동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 11억 인구가 1500가지도 넘는 말을 하는 인도에서 힌두어 인구는 3억명이 넘는 반면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인구는 20만명도 채 안 된다. 능력이 되는 노동자라면 오히려 영국이나 캐나다에 넘쳐난다. 그러나 그쪽은 임금이 높아서 미국 기업도 선뜻 맡기지 못한다. 인도도 앞으로 잘살게 된다면 그런 일을 맡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도가 인터넷으로 미국 자료를 처리해주는 것은 한국이 예전에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역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국경과 거리가 사라져간다는 속설도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동떨어진다. 먼 나라보다 가까운 나라와 더 많이 무역한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중력모형’이라 부르는 이론인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개방적인 미국-캐나다 국경이나 유럽연합 내 국경조차도 아직 무역의 자유로운 흐름을 적잖이 막고 있다. 교역량뿐 아니라 전화와 인터넷 사용량마저도 거리와 국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세계화가 여러 나라의 경제제도를 통일시킨다는 것도 잘못된 속설이다. 노동, 복지, 기업·금융 관계, 조세 등 많은 제도는 선진국 사이에서도 차이가 크며, 어느 것이 낫고 못한지 따지기 어렵다. 특정 형태의 세계화를 거부한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노르웨이와 스위스는 유럽연합 가입을 줄곧 거부하지만, 국민소득이 미국보다 훨씬 높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29개국 가운데 아직도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뿐이다. 특정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는다고 세계화와 담쌓는 것은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안에서 이뤄지는 다자간 협정과 달리, FTA 같은 양자간 협정은 특히 협정국 사이에 경제력 차이가 클 경우 ‘평등한’ 협정을 맺기 어렵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시장과 관련한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구실은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안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부는 국방과 치안으로 재산권을 보호한다. 통일된 화폐를 만들고 그 가치를 유지해 상거래를 돕는다. 금융과 환경 기준을 마련해 감독한다. 각종 상거래 제도와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해 거래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식품과 의약품 따위의 안전을 개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정부가 기준을 마련해 검사하고 강제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멜라민이나 광우병 물질을 각자 골라내가며 먹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독과점을 규제하고 환경기준을 마련하며 지나친 소득 불평등을 고친다. 이러니 정부가 없으면, 또는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면 시장은 잘 움직이지 못한다. 국제 경제가 그나마 돌아가는 것은 각 나라에 정부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아우르는 국제 정부가 없기에 국제 경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시장의 안전성이 국제 경제에서는 모두 다 허술해진다. 국제 정부 대신 국제 기구가 여럿 있기는 하지만 하는 일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국제 기구는 각 나라 정부에 권고할 뿐 강제하지 못한다. 강제하는 것은 결국 각 나라 정부의 몫이며, 나라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리게 되면 문제 해결은 어렵고, 되더라도 더디다. 국제무역기구가 생기면서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강대국이 억지를 부리면 대책이 서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는 국제 경제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속설에 따르면 국경 너머 훨훨 날아다니는 국제 자본을 끌어들여야만 경제가 살 수 있고, 그 자본은 국내 규제를 풀어야만 끌어올 수 있다. 자본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는 대로 자유를 안겨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지금 투자할 돈이 모자라거나 규제가 심해 투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불확실성이 높아 그런 것이다. 금융은 정부가 안전을 최종 책임져야 할 대표 부문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요즘 하루하루 더해간다. 금융은 겉으로는 돈을 주고받는 일이지만 속으로는 위험을 사고파는 일이어서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금융의 건전성은 그 건전성을 남이 믿어주느냐에 크게 달려 있고, 한번 문제가 터지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간다. 때문에 금융에는 여러 안전장치가 꼭 있어야 한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겪으면서 여러 나라에서 예금보험, 지불준비금, 자기자본 요구조건과 자산규제, 금융감독, 최종대부자 기능 등 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했고, 덕분에 금융시장은 그 뒤 많은 나라에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고 발달해왔다. 그런데 이 안전장치들이 아주 허술해지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국제 금융시장이다. 국내 금융과 달리 국제 금융에서는 관할권과 책임소재가 나라 사이에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라 간 협조도 쉽지 않다. 선진국에서도 문제지만 특히 심각한 것은 후진국인데 국내 금융시장과 정부의 금융감독 기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많은 후진국에서 서둘러 금융시장을 개방했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한 경우가 한국을 비롯하여 많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후진국에게 금융 개방에 앞서 국내 금융부터 정비하라고 요구할 정도다.
대비책 없는 세계화는 ‘독’ 개방이 국내 경제에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무역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역을 개방하면 국내 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국제 시장 변동에 따른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국제 경쟁이 높아지면 작은 변화에도 일자리를 그만두거나 옮길 일이 많아진다. 이를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해주지 못하면 고용불안과 소득불평등 확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쇠고기 시장 개방에 묻어오는 광우병 물질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묻어오는 ‘투자자 국가 제소권’ 같은 독소 조항도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다. 나아가 외국 자본을 국내 사회기반시설 투자에 함부로 참여시키는 것은 공공서비스 기반을 허물고 독점 이윤을 허용할 염려도 있다. 세계화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를 하되 개방에만 정신이 팔려 위험 대비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대비책 없는 세계화는 약 대신 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세계화를 성공시킨 선진국의 비결이기도 하다. 하버드 대학 로드릭 교수가 선진국을 비교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개방을 많이 한 나라일수록 정부 규모가 크다. 시간적으로도 세계화가 확대됨에 따라 정부 규모가 커져왔는데 특히 사회안전망 확충이 두드러진다. 세계화 위험에 대비하다 보면 정부가 할 일이 세계화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지는데, 이 점은 외부 충격에 약한 작은 나라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개방 정도는 이미 높지만 정부 규모는 작다. 그만큼 국내 경제는 세계화에 따른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는데 정부는 그 위험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다. 국민 삶은 그만큼 고단하다. 사회안전망은 장기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요즈음 세계화 대책뿐 아니라 내수경기 대책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폭풍우가 몰려올 때는 문 열고 나가기에 앞서 집안의 빈틈부터 찾아 메우는 것이 순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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